인문학/철학 등

최후의 만찬은 먹는 상징의 한국문화와 이어진다.

휴먼스테인 2014. 4. 7. 00:08

문화를 뛰어넘는 기독교

 

기독교문화에는 한국전통 문화와 쌍방향을 이루는 신비한 힘을 내포하고 있다.

최후의 만찬은 먹는 상징의 한국문화와 이어진다.

 

놀랍게도 전 세계적으로 번역된 기독교 성서 중에서 잘된 번역 가운데 하나가 한국 성서로 꼽힌다고 합니다.

나는 기독교에 회심하기 이전에 성경을 문학텍스트로 대학에서도 가르치고

나 자신이 글속에서 많이 인용도 했지만 실상 무슨 말인지 의미가 통하지 않은 대목들이 많이 있었지요.

영어나 일어 성서를 보고 그 뜻을 알게 된 적도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외국 학자들 가운데 창세기 11절을 비교하면서 영역보다 훨씬 잘된 번역이라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겁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영어성경을 보면 ‘the earth was formless’ 혹은 ‘without form’으로 되어 있지요.

즉 땅이 ‘형태가 없다’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혼돈混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혼’과 ‘돈’은 모든 것이 섞이고 불분명한 상태 즉 코스모스에 대한 카오스의 상태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혼돈이란 한자는 다 같은 물을 뜻하는 삼수변에 쓴 것인데

formless’ 보다 훨씬 다음에 등장하는 “수면에 운행 하시니라”의 말과 너무나도 잘 어울립니다.

뿐만 아니라 형태란 말은 겉모양의 단일한 의미이지만 혼돈은 두 의미가 하나로 복합된 것으로

음양의 경우처럼 같은 말끼리 또는 반대되는 말끼리 조화를 이루 있다는 점입니다.

 

다음 구절도 마찬가지입니다.

‘공허하다’ ‘empty’라고 되어 있는데, ‘공’도 빈 것이고 ‘허’도 빈 거예요.

그 다음 ‘darkness’ 역시 우리는 흑암이라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암’과 ‘흑’의 두 글자가 어울리어 하나의 단어를 만든 것이지요.

영어로 암darkness’ 로 ‘light’의 반대에요.

‘흑’은 ‘white’에 대한 ‘black’으로 흑암이란 말은 단순한 어둠이 아니라

빛과 색채의 대칭성을 함유하고 있는 통합적 이미지를 지니고 있지요.

한자말에서 온 한국말에는 이런 복합개념으로 하나의 통합개념을 나타내는 말들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목욕이라고 하면 그냥 영어의 bathe를 뜻하는 말로 아는 사람이 많지만

샤워를 뜻하는 것이고 욕 몸 전체를 담그는 bathe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섬세한 의미의 음양조화로 창세기의 혼돈과 질서의 복합적인 양상을 아주 실감 나게 보여 줍니다.

 

그러고 보면 먹는다는 말을 가장 많이 사용하는 한국어

그리고 한국문화와 기독교에서 성찬식을 하는 먹는 제례가 아주 잘 어울립니다.

우리의 오감 중에서 제일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시각입니다. 하늘의 별까지 보지 않습니까.

그 다음에가 청각이지요. 번개가 친 다음에 천둥소리가 들리지요.

그 다음이 후각입니다. 꽃은 바짝 다가서야 비로소 향기를 맡을 수가 있어요.

그리고 아주 밀착되어 틈이 없는 것이 촉각이지요.

손으로 만지는 대상은 듣고 맡는 것보다 훨씬 더 가까운 것에 있습니다.

포옹하는 경우처럼 서로 밀착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미각은 어떨까요.

이미 거리는 완전히 소멸되어 대상은 내 속으로 나의 입 나의 몸으로 들어온 상태입니다.

이렇게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생리적 신진대사를 돕는 양분의 섭취가 아니라

존재와 존재를 결합하고 일체화하는 융합의 행위인 것입니다.

 

사과가 아름답다, 사과가 향기롭다, 사과가 매끄럽다는 것은 사과가 내 밖에 대상으로 있을 때지만,

사과를 먹는다고 했을 때는 이미 사과는 사라지고 나와 하나가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진리라면 바깥이 아니라 내 몸 안으로 체험한 것과 같습니다.

 

그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의 의미, 제자들과 함께 나누어 먹는 빵과 포도주의 의미죠.

빵은 예수님의 몸이고 그 포도주는 피입니다.

가령 요한복음 650절에 56까지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음식의 이야기는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되는 결합의 상징으로 등장합니다.

그리고 계속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는 말이 그것입니다.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것이 예수를 매개로 하여 하늘과 땅의 것이 일체화oneness하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최후의 만찬”으로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다 해도

식사를 나누는 의식을 통해 제자들 인간들과 함께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한솥의 밥을 먹는 것으로 한식구가 되는 성찬식과 같은 일을 우리는 일상 속에서 반복하고 있었으니까 말입니다.

 

거짓말인가 보세요. 꽃놀이 갔다가 꽃만 보고 오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꽃 동산에 앉아서 사람들은 싸온 음식을 여럿이서 둘러앉아 먹습니다.

눈으로 꽃을 보는 것이 아니라 코로 향내를 맡는 것이 아니라

싸온 도시락을 펼쳐놓고 먹으며 아름다운 경치를 이빨로 씹고 혀로 맛보고 목구멍으로 삼키면서 온몸으로 감상하는 것이지요.

꽃과 그 경치는 바깥이 아니라 음식을 통해서 나의 몸 안에 들어와 하나가 되어 버립니다.

 

예수님의 최후 만찬은 말보다, 이적을 보이는 것보다도

이 땅에서 최종적으로 보여준 강렬한 소통의 의지요. 그 방식이었던 겁니다.

한 테이블에 앉아서 함께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시는 식사 행위를 통해서

진리와 영성을 제자들 몸 안으로 직접 집어넣은 수육화도 같은 연출이었다고 봅니다.

빵은 예수님의 살이었고 포도주는 예수님의 피였지요.

예수님과 제자들은 이미 주체와 객체가 아니라 빵과 포도주로 한몸이 된 것이지요.

 

그래서 미국의 소설가 존 업다이크는 「음악학교」라는 단편소설을 통해서 이 성찬식의 본래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보여줍니다.

개혁적인 젊은 신부들이 모여 성찬식 때 성병을 먹는 방식에 대해서 토론을 하는 장면입니다.

지금까지 성찬식에서 성병聖餠 혀에 올라놓고 녹여 먹었지만 이것은 잘못된 의식이라는 비판이었지요.

성경에는 단지 빵을 가리키시며 테이크taketh 또는 이트eat라고 하셨지

어느 곳에서도 녹여서 먹으라고 한 구절이 없다는 겁니다.

그래서 젊은 신부들은 성병을 더 딱딱하고 두껍게 만들어

신도들이 어금니로 씹어 먹을 수 있도록 해야한다고 주장했던 것이지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금니로 씹지 않고 수동적으로 녹여서 삼키기 때문에

오늘의 기독교 신앙은 나약하고 소극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지요.

 

정말 그래요. 한국 사람이 쌈 싸먹는 것을 한번 보세요. 어금니로 씹는 정도가 아니지요.

상추 앞에 밥과 반찬과 쌈장을 섞어 도저히 입에 들어갈 것 같지 않는 푸짐한 보쌈을 만들어

통째로 입안에 넣어 와작와작 씹어 먹는 모습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와요.

신사가 어디에 있고 숙녀가 어디에 있습니까.

쌈 싸먹는 것을 보면 정말 하늘과 땅의 것이 하나로 뭉쳐 몸속으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젯상을 차린 것을 우상숭배라고 생각하지 말고 성찬식과 같은 것으로 이해하면 훨씬 이해가 빠를 거예요.

젯상에 차려놓은 음식을 먹으며 조상의 영을 영접하듯이

그렇게 빵과 포도주를 마시며 예수님을 영접하고 있으니

어찌 마르다와 마리아가 우리를 부러워하지 않겠습니까.

 

『이어령지음, 지성에서 영성으로, p195~199,열림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