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복음사가는 요한 세례자가 예언자라는 말을 결코 하지 않는다.
요한 복음서 1장 21절과 25절을 읽어보자.
“그러면 그 예언자요?” 하는 질문에 요한 세례자는 아니라고 대답한다.
그러자 그 사람들이 질문을 계속한다.
“당신이 그리스도도 아니고 엘리야도 아니고 그 예언자도 아니라면, 세례는 왜 주는 것이오?”
이 질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여기서는 세례와 예언 활동이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다.
그리고 사실, 종말론적인 의미의 죄 사면을 베풀어 준다는 세례 동작을 종말론적인 예언자의 내림과 분리시킬 수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 요한 복음서에서는 이 종말의 예언자가 오로지 예수뿐이지 요한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요6,14; 7,40).
반대로, 공관 복음서들은 군중이 요한 세례자를 예언자로 생각하였다고 회상하고 있다(마르 11,32; 마태14,5; 21,26).
한 걸음 더 나아가 마태오 복음서 11장 9~10절과 루카 복음서 7장 26~27절에 다 같이 전해진 옛 어록 자료 곧 Q에 따르면, 예수 자신이 군중에게 요한을 가리켜 종말의 예언자 엘리야라고 했다는 것이다.
“무엇을 보러 나갔더냐? 예언자냐?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이다. 그는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사람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나의 사자를 보낸다.” (말라 3,1 참조. 엘리야에 대한 대목)
그러니까 사람들이 요한 세례자에게 붙여 준 예언자라는 칭호는 당시에 벌써 그리스도교 집단들에서도 논란의 대상이었다.
예수 자신으로 말하면, 군중은 예수를 물론 예언자로 간주하였다는 것이 역시 공관복음서들의 보도다(마르6,15;마태21,11.46; 루카7,16).
그러나 제자들은 이것이 사실이라고 시인한 적이 한 번도 없으며, 예수도 여기에 대해서 간접적으로만 언급한다.
가령 마르코 복음서 6장4절에서는 “예언자는 어디에서나 존경받지만 고향과 친척과 집안에서만은 존경받지 못한다.”고 하고, 루카 복음서 13장 33절에서는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다.”고 말한다.
요한 복음서에서도 제자들이 예수를 가리킬 때 예언자라는 칭호를 직접적으로 사용하는 일은 없다. 정작 이 말을 사용한 사람들은 역시 군중이다(요한7,40)
「샤를르 페로지음ㅣ박상래옮김,예수와 역사,p257~258,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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