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슨 권위를 내세워 예수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려는 것일까?
우리는 이미 일명 필론의 작품(≪성경 고대사≫ 16,1)에서 모세가 명한 것으로 되어 있는 옷의 술을 거부하는 ‘코레의 시너고그’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구절에서 좀 더 읽어 내려가면, 벤야민 사람들이라는 어떤 사람들이 자신들이 범했다는 죄를 이렇게 고발하고 있다.
“우리는 율법의 책을 뒤져서 그 내용을 참으로 하느님이 기록하였는지, 아니면 그 가르침을 모세가 자기 자의로 부과했는지 알아보려 했습니다.”(≪성경 고대사≫ 25,13)
그러니까 율법의 몇몇 부분에 대해서는 하느님의 권위를 문제시했다는 뜻이다.
실상 이들은 율법에서 하느님의 작품 또는 계명과 모세의 그것과를 구별하고 식별하려는, 이를테면 일종의 성경 비판을 처음으로 시도하였던 것이다.
어떤 유다인들은 ‘열 말씀’을 너무 지나치게 치켜올리는 바람에 율법의 다른 법 규정들을 그보다 한 단계 낮은 것으로 격하시키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법 규정들은 하느님에게서 직접 온 것이 아니고 모세나 그 밖의 다른 어떤 천사들의 중개를 통해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갈라 3,19; 사도 7,38.53; 히브 2,2 참조).
이 문제는 매우 심각하였다. 그래서 기원 후 1세기 말 또는 2세기 초의 유다교 당국에서는 유다교 회당의 기도 의식에서 십계명의 독송讀誦을 완전히 폐지시켜 버렸다.
율법에 대한 이러한 비판적인 태도에 침례주의자들이 결코 무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도 이 침례주의자 중의 하나였다. 적어도 초창기에는 그랬다.
그런데 우리는 바로 이 예수에게서 비슷한 태도를 찾아볼 수 있다.
가령, 이혼에 관한 마르코 복음서 10장 1~12절의 대목에서 예수는 모세의 말을 뛰어넘어 하느님의 권위에 직접 호소하는 것을 읽어 볼 수 있다.
“너희 마음이 완고하기 때문에 모세가 그런 계명을 기록하여 너희에게 남긴 것이다.”(마르 10,5)
이어서 예수는 이혼을 반대하는 논거를 들어서 이 문제에 관한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 무엇인지를 표현하려는 시도를 벌인다.
창조주 하느님의 진정한 뜻이라지만 과연 무슨 권위를 내세워 예수는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시키려는 것일까?
율법의 이런저런 부분을 상대적으로 더 중요시하느냐 또는 거부하느냐 하는 평가를 넘어서서 그 권위에 관한 이 질문이야말로 당시로서는 가장 치명적인 문제였다.
과연 누구의 권위로 또는 무슨 명목으로 하느님의 계시 가운데서 우리가 감당할 수 있고 없고의 여부를 가려낼 수 있다는 말인가?
가령 요한 복음사가에 따르면, 예수는 ‘여러분들의’ 율법이니 ‘그들의’ 율법이니 하는 표현을 쓰면서 율법에 대해 상당히 거리를 떼어 놓고 유다인들에게 말을 건네곤 하는데, 예수의 이 무엄한 태도를 과연 어떻게 정당화시킬 수 있다는 말인가?(요한 8,17; 10,34; 15,25) 사실, 당시는 권위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게 제기된 시기이기도 했다.
「샤를르 페로지음ㅣ박상래옮김,예수와 역사,p238~240,가톨릭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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