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사도, 이자놀이도 못한 종
가장 어려운 비유
달란트 비유(마태 25:14-30)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많은 비유들 가운데 가장 어려운 비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생략된 부분이 많거나 설명이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이 비유는 가장 생략된 부분이 적고 설명도 충분한 비유입니다. 그럼에도 이 비유가 어려운 까닭은, 비유의 메시지가 예수님의 다른 비유들이나 말씀들, 가르침들과 사뭇 다르기 때문입니다. 정말 어떤 수단을 쓰든지 곱절을 남기는 장사를 한 종이 칭찬받아야 하는 훌륭한 종입니까? 이자놀이라도 해서 이윤을 남겨야 충성스런 종일까요? 이 비유의 주인의 모습은 예수님이 다른 비유들과 가르침에 나오는 주인의 모습과는 전혀 다릅니다. 달란트 비유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성경을 읽으면서 ‘과연 어떤 사람이 올바른 기독교인인가? 나는 어떤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를 생각합니다. 기도나 명상을 하거나 또는 다른 종교활동이나 사회활동을 하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겠지만, 많은 경우에 기독교인들은 바람직한 기독교인의 모습을 성경에서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성경은 바람직한 기독교인상을 확실하고 일관성 있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성경의 어떤 부분을 읽어보면 이런 모습이 바람직한 것 같고, 다른 부분을 읽어보면 저런 모습이 바람직한 것 같습니다. 성경이 워낙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확실한 한 가지 모습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렇게 전체적으로 확실하고 일관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않을 때는 이미 알고 있는 확실한 것에 비추어 불확실하거나 알지 못하는 것을 이해하려 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입니다. 확실한 것이 불확실한 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기준 역할을 한다는 말입니다. 달란트 비유를 깊이 생각하지 않고 읽으면 전하려는 메시지가 비교적 확실한 것 같습니다. 이윤을 남긴 종들은 착하고 충성스럽다고 칭찬받았고 이윤을 남기지 못한 종은 악하고 게으르다고 책망받았으니, 우리도 이윤을 남긴 종들처럼 어떻게 하든지 이윤을 남겨야 한다는 것이 비유가 전하려는 메시지인 것 같습니다. 그렇게 되면 어떤 이유로도 이윤을 남기지 못한 잘못이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그런 행위의 윤리적 타당성이 제기될 수는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것일 뿐입니다. 이윤을 남겨야 한다는 지상 과제의 수행을 부수적인 윤리적 타당성 여부가 막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누가 바람직한 기독교인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는다면 ‘이윤을 많이 남긴 사람’이 바람직한 기독교인이라는 결론이 나옵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이미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그래서 너도나도 이윤을 남긴 종같이 되려고 애를 씁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세번째 종은 본받지 말아야 할 것은 물론이고 그런 사람과는 상종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지금까지 달란트 비유를 읽어온 방법이고 그것을 삶에 적용해온 방법입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곽건용 지음, 하느님도 아프다,p122~124,도서출판 한울」
주인은 누구이고, 종은 누구인가?
비유를 이해하는 데 첫번째 관건은 돈을 맡기고 길을 떠난 ‘주인’이 누구인가 하는 점입니다.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이 주인을 하느님이라고 쉽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예수님의 다른 비유들에서 아버지, 또는 주인은 하느님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경우가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특히 달란트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하느님이 될 수 없습니다. 같은 비유를 기록한 누가복음 19장의 병행구절과 비교해서 읽어보면 이 사실이 더욱 분명해집니다. 누가복음 병행구절에 따르면, 주인은 한 귀족이고 그가 먼 길을 떠난 이유는 자기보다 더 높은 사람에게서 왕위를 받아오기 위해서였습니다. 현대인은 여기서 ‘이 자가 과연 누굴까? 역사책을 뒤져야 하나?’라고 생각하겠지만 비유를 직접 들었던 청중들은 그가 누구인지 당장 알아차렸습니다. 당시 아르켈라오라는 사람이 왕위를 받기 위해 로마황제에게 갔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일은 워낙 유명한 사건이어서 많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으므로 비유의 청중들도 그를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역사적 인물인 아르켈라오를 소재로 삼아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주인이 하느님을 가리킬 리 없습니다. 아무리 비유라지만 예수님께서 백성의 원성을 듣던 권력자를 하느님을 가리키는 데 썼을 리 없습니다.
본문에서 주인의 성격을 보여주는 구절은 1달란트를 땅에 묻어뒀다가 책망을 들은 세번째 종이 한 다음의 말입니다.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운 나머지 저는 주인님의 돈을 가지고 가서 땅에 묻어두었습니다(마태 24-25절)
여기서 주인은 ‘무서운 사람’이고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 데서 모으는 사람’입니다. 이 말은, 자기는 일하지 않고 남이 일해놓은 것을 빼앗아 먹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놀랍게도 주인은 이 말에 대해 부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한술 더 뜹니다.
너야말로 악하고 게으른 종이다. 내가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 데서 모으는 사람인 줄 알았더라면, 내 돈을 쓸 사람에게 꾸어주었다가 내가 돌아올 때에 그 돈에 이자를 붙여서 돌려주어야 할 것이 아니냐?(마태 26-27절)
많은 성경 해설서들은 이 대화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좋은 주인에게서 책망받을 것이 두려워 선수를 쳐서 먼저 주인을 나쁜 사람으로 몰아세웠지만, 주인은 이에 대해서 “설사 백 번 양보해서 네 말이 옳다 하더라도 너는 그 돈을 남에게 꾸어주려는 수고도 하지 않았으니 더 변명할 것이 없다”고 현명하게 대처했다고 말입니다. “너는 적어도 이자 돈이라도 벌었어야 했는데 그것도 하지 않을 정도로 게을렀다”라고 주인이 종을 책망했다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석하는 이유는 별 생각 없이 주인을 하느님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인이 하는 말은 모두 옳고, 종이 하는 말은 모두 옳지 않은 말이 됩니다. 하지만 주인을 하느님으로만 보지 않으면 얘기는 완전히 달라집니다. 정말 이 주인이 하느님을 가리킵니까? 예수님이 믿었던 하느님은 ‘지독한 분’이고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 데서 모으는 분’입니까? 하느님은 “너는 최소한 이자놀이라도 했어야 했다”라고 말하는 분입니까? 그럴 리 없습니다. 예수님이 믿었던 하느님이 그런 분일 리 없습니다. 비유에 나오는 주인은 결단코 하느님이 될 수 없습니다. 그는 땅을 많이 갖고 있고 재산이 많은 한 사람의 부자일 따름입니다.
다음으로 ‘종들’은 누군지를 생각해봅시다. 본문에는 ‘종’으로 되어 있지만 전후맥락을 따져보면 이들은 허드렛일이나 하는 종이 아니었습니다. 어떤 어리석은 주인이 그런 사람들에게 그토록 큰돈을 맡기겠습니까. 금 1달란트는 9만 명의 하루 품삯이니 요즘 미국 최저임금으로 계산하더라도 500만 달러가 넘는 돈입니다. 5달란트는 2,500만 달러입니다. 물론 돈의 액수는 과장이겠지만 그런 큰돈을 맡은 종들이 허드렛일이나 하는 사람일 수는 없습니다. 돈을 맡은 종들은 중간관리자 정도의 사람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들은 어느 정도 재량권을 갖고 주인의 재산을 불렸습니다. 그 방법은 농부들에게 돌아갈 몫을 가로채는 방법이었습니다. 종들이 두 배로 이윤을 남겼을 때 그 이윤 역시 농민들에게서 온 것이나, 아니면 장사를 해서 폭리를 취한 데서 왔을 수밖에 없습니다. ‘심지 않는 데서 거두고 뿌리지 않는 데서 모은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나 허위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세 사람의 종은 이전까지는 이런 일을 유능하게 처리해온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래서 주인은 이번에도 이들을 믿고 달란트를 맡겼겠지요. 두 명의 종은 주인의 기대에 부응하여 큰 이익을 남겼습니다. 그런데 세번째 종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는 왜 주인이 맡긴 돈으로 장사도 하지 않고 이자놀이도 하지도 않았을까요? 그는 달란트를 땅에 묻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번만은 게으름을 피우고 싶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그랬다면 그는 “주인님, 저는 주인께서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뿌리지 않은 데서 모으시는 무서운 분이신 줄 알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주인에게 대들지 않았을 겁니다. 오히려 구차하게 변명을 늘어놓았겠지요. 머리를 긁적이며 “이번에는 이상하게 일이 잘 풀리지 않아서……”라고 변명했겠지요. 하지만 그는 구차하게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라고 외친 우화의 신하처럼 주인이 얼마나 악한 사람인지 드러내놓고 말했습니다. 비유는 왜 세번째 종이 돈을 땅에 묻었는지를 말해야 할 중요한 대목에서 침묵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느 날 그는 들에 나가 허리가 휘어지게 일하는 농부들을 보았습니다. 물론 그는 그날 뿐 아니라 매일 들판에서 농부들을 보았습니다. 그때까지의 그의 눈에는 농부들이 자신의 출세를 위해 딛고 일어서야 할 발판밖에 되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얼마나 착취하느냐가 자기가 얼마나 출세하느냐를 결정했습니다. 그동안 그는 이 일을 냉정하게 수행해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날따라 새로운 눈으로 그들을 바라봤겠지요. 그리고 같은 눈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봤겠지요. 저들은 누구고 나는 누구인가? 나는 저들을 착취하는 거대한 악의 구조의 한 부품에 불과하지 않은가! 악의 바퀴가 굴러가게 만드는 한 부품이 아닌가! 주인에게서 ‘잘했다’고 칭찬받을 때 농민들은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을까! 자기가 한 계단 올라갈 때마다 농부들의 삶은 한 계단씩 밑으로 떨어져 극도의 빈곤으로 내몰렸습니다. 그는 그때까지 자신이 해온 일들을 회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결심했습니다. “이제 서로 빼앗고 빼앗기는 죄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자!” 하지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습니다. 주인은 마음에 들지 않는 종을 다른 종으로 바꿔버리면 그만입니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그는 돈을 땅에 묻고 당당히 주인을 비난하기로 했습니다. 그 대가가 무엇일지는 불을 보듯 뻔했지만 그는 그렇게 하기로 결단했습니다.
그가 어떻게 이런 사고의 전환을 이뤘는지도 추측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성령께서 그를 이끌어주셨다고 믿습니다. 성령이 아니면 누가 그럴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는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났습니다. 죄의 악순환 바깥으로 스스로를 내던졌던 것입니다. 그 ‘바깥 어두운 데’는 그동안 자기가 억압하고 착취했던 농부들이 사는 곳이었습니다.
「곽건용 지음, 하느님도 아프다,p124~129,도서출판 한울」
어떤 기독교인이 될 것인가?
제가 달란트 비유를 읽은 방식은 일반적으로 읽혀왔던 방식과는 정반대입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두려움도 없지 않습니다. ‘이렇게 읽는 것이 과연 올바른가? 달란트 비유를 이렇게 읽어도 괜찮은가?’하는 두려움 말입니다. 보편적으로 읽혀온 방식과 워낙 차이가 나기 때문에 생기는 두려움입니다. 하지만 제가 비유를 읽은 방식에 어디 잘못된 점이 있습니까? 잘못된 전제나 잘못된 해석이 있었습니까? 오히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읽어온 방식에 잘못된 전제가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제가 읽은 방식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중요한 점은, 이런 식으로 달란트 비유를 읽으면 이상적인 기독교인의 모습이 기존의 사고방식과 정반대가 된다는 점입니다. 이상적인 기독교인은 곱절을 남겨 주인에게 칭찬을 받은 첫번째나 두번째 종이 아니라, 주인에게서 ‘악하고 게으르다’고 책망을 받은 세번째 종이 됩니다.
우리는 과연 세번째 종처럼 살 수 있을까요?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자기가 쌓아왔던 지위와 경제적 부를 모두 포기하고 ‘바깥 어두운 데’로 뛰쳐나갈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저는 세번째 종같이 살자고 말하지는 못하겠습니다 저도 그렇게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렇게는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너무 자본주의적으로 이익만 추구하면서 살지는 맙시다. 남들은 어떻게 사는지 전혀 관심도 없고 돌아보지도 않으면서 나만 편하면 그만이고 나만 성공하면 그만이고 나만 천국 가면 그만이라는 자세로 살지는 맙시다. 달란트 비유는 우리들에게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말입니다. 지금까지 너무 자본주의적으로 살아왔다면 지금부터라도 회개하고 조금만 더 남을 생각하며 삽시다. 나 때문에 피해 당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그들과 더불어 함께 살길을 찾아봅시다.
간혹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도저히 살 수 없을 정도로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십중팔구 이 사회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도태되고 맙니다. 저는 이런 모습 또한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인은 자기가 살아가는 삶의 현장에서 도태되면 안 됩니다. 기독교인은 사회의 빛이요, 소금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떤 기독교인이 될 것입니까? 평생 묻고 또 물어야 할 질문입니다. 이 질문에 답하는 데 달란트 비유는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근거로 더 좋은 기독교인으로 사는 길을 찾아나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곽건용 지음, 하느님도 아프다,p129~130,도서출판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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