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이 무엇인가(주로 물질)를 주기 때문에 믿게 만드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
예수님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 말씀하십니다.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이 구절을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번역한 공동번역 성서는 대단히 잘못 번역했습니다
원문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마음’과 ‘영’은 같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누구를 가리킬까요?
많은 성경학자들이 이에 대한 해석을 내놓았는데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을 향해 어린아이같이 자신을 활짝 열어놓고 있기에, 그리고 오로지 하느님에게만 모든 희망을 걸고 살기에 자기 자신을 비울 수 있는 사람이라는 해석입니다.
이런 사람이 ‘영으로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해석을 자본주의 사회의 특징과 연결시켜 생각해보면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
자본주의 사회에 살면서 가난한 마음으로 사는 길은 물질 관계 속에 감추어져 있는 인간관계를 발견하고, 물질에 대한 탐욕 때문에 일그러진 인간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같은 생각을 하느님에 대해서 해보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으로 가난하게 사는 삶은 물질 관계 속에 매몰 되고 잊혀진 인간과 하느님의 관계를 다시금 발견하고 되살려내는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물질은 분명 하느님의 복입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의 폐해는 물질 관계가 하느님을 숨겨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하느님이 하느님이기 때문에 믿지 않고, 하느님이 무엇인가(주로 물질)를 주기 때문에 믿게 만드는 사회가 자본주의 사회입니다.
이 사회에서는 물질의 축복을 주지 않는 하느님은 하느님이 아닙니다.
그런 하느님은 굳이 믿을 이유도 없습니다.
본래부터 그랬던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세뇌를 받았기 때문에 그렇게 믿게 됐습니다.
「곽건용 지음, 하느님도 아프다, p118~120, 도서출판 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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