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이전의 유대교
■■■■■ 보수파 :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
초기기독교의 문제점은 그것이 모태로 하고 있는 유대교와의 관계에 있다. 예수는, 새로운 종교의 창시자가 아니라, 유대교도의 한 사람으로서 진정한 유대교의 정신을 살리려 하였다.
예수 생존 당시 유대교의 유력한 두 개 종파는 사두가이파와 바리사이파였다. 둘 다 기원전 3~2세기경에 형성되었으나 서로 적대적이었다.
사두가이파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귀족적 사제집단이었다. 사두가이라는 이름은 솔로몬시대의 제사장 사독에게서 따온 것이다.
▶신약성서 시대 유대교의 종파들은 아래에 언급되는 사두가이파ᆞ바리사이파ᆞ에세네파 이외에도 이른바 ‘열심당(zealot)’으로 총칭되는 집단이 있었다. 이들은 무장투쟁을 전개하였으며 에세네파와도 약간 연관이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시키리파는 로마인이나 친로마의 유대관료들에 대해 테러암살을 감행하였다.
반면 바리사이라고 하는 명칭은 이교로부터 ‘구분된다’는 의미를 갖데, 이는 특히 기원전 3세기 헬레니즘이 유입되어 유다이즘이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 유대교를 옹호하면서 나온 것이다. 이들은 철저한 율법주의자들로 주로 설교를 직업으로 하였다. 이들도 뒷날에는 율법의 내용보다 제의적 형식과 정통의 명분에 얽매여 허식ᆞ오만ᆞ허영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초기 한 동안은 희생제의 물질적 이득을 구하는 대사제직의 사두가이파에 반대하여 물질보다 영적인 것을 중시하였고, 또 사두가이파보다 더 대중적이고도 민주적이었다. 사두가이파는 뒷날 로마인들에게 저항하였고 로마인에 의해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기원후 70년경 이후 사라졌다.
반면 60년대에 유대인이 로마에 항거하였을 때 바리사이파는 로마에 협조하였으며, 성전파괴 이후에도 예루살렘에서 야브네로 거주지를 옮겨 정통파 유대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사두가이파는 모세5경만을 경전으로 인정하고 그밖에 구비전승을 거부하였다. 예를 들어 모세5경에 나와 있지 않은 죽은자의 부활 같은 것은 믿지 않았다. 죽은 자의 부활개념은 기원전2세기경에 형성된 것으로 전에 없던 것이었다.
또 천사나 내세, 영혼불멸이나 영적 세계 등을 부인하였으니, 이는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과 비슷하다. 당시의 유대교는 이들 특권제사장 계층이 중심이 되어 의식을 중시하는 형식적 종교로 변하였다. 사두가이파는 성전을 지키고 종교전통 및 의례를 엄하게 준수한다.
사두가이파보다 대중적이었던 바리사이파는 회당에서 율법을 해석하고 가르쳤다. 이들은 당시 식민지 현실 속에서 이교적 습속으로부터 전통 유대교의 율법을 분리해내려 했을 뿐 아니라, 구전되어 내려온 율법들도 받아들였다. 즉 기록된 율법뿐 아니라 구비전승도 중시하였다. 그래서 영혼불멸, 내세와 부활, 천사와 마귀, 하나님의 절대주권 같은 새로운 개념을 유대교에 추가하였다. 또 율법해석은 상황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융통성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한편 하나님의 말씀만큼 인간의 이성도 중시하여 인간의 자유의지를 부인하지 않았다. 인간에게는 덕과 악을 행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상의 삶에 따라 부활하여 다시 생명을 얻는 상을 받거나 영원한 감옥에 갇히는 형벌을 받게 된다고 믿었다.
「최자영지음,그리스문화와기독교,p109~113,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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