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와의 만남으로 인해 예수와 상관없는 종교가 되어버렸다.
어느 종교이든 초기 형성시기에는 순수하고 열정적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면서 교조적이고 관습적이며 권위적으로 흘러간다.
그러나 기독교는 처음 탄생시기부터 계속 박해를 받았던 것에 비하면 너무 빨리, 너무 쉽게 세상과 손을 잡았다.
예수가 십자가에 처형을 당하면서까지 권력과 타협하지 않고 신의 말씀을 따르려고 한 것에 비해서…
아래 글을 읽다가 내 생각을 적어봤다.
로마의 재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제정이 성립(BC27)한 다음 3세기 중엽까지의 초기 제정에서 황제는 신이 아니라 공화정의 관리였으며, 물론 황제도 시민의 한 사람이었다.
이는 공화정의 원수(元首)와 같다는 뜻에서 원수정[프린키파투스]이라 불린다.
원칙적으로 황제는 독재자가 아니었다.
황제와 원로원, 나아가 중앙정부와 속주 도시들 사이의 권력의 배분에 의한 이원적 지배체제가 가장 원만하게 이루어진 것은 2세기의 5현제시대다.
다른 하나는 전제적인 권력을 가진 동방적 군주와 같은 것이다. 황제는 더 이상 일반시민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거나 아니면 신에 준하여 신으로부터 가장 총애를 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 같은 제정의 변화는 바로 콘스탄티누스 황제를 전후한 무렵에 일어났으며, 콘스탄티누스 황제 바로 앞 황제이며 284년에 즉위한 디오클레티아누스황제 때 본격화되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제국의 수도를 서쪽 로마에서 동쪽 흑해입구 콘스탄티노플로 옮겼다.
이 곳은 자유시민의 전통이 강한 로마보다 전제권이 훨씬 잘 먹혀 들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황제를 신과 동일시하려 하였으나 기독교도들의 반발에 부딪쳤다.
기독교도는 유일신 야훼 이외의 다른 신을 인정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기독교의 유일신을 인정하고 황제를 속세의 최고목자로 정의함으로써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이것은 사람 사이에 차별을 두는 것으로 기독교의 변질을 뜻한다.
원시 기독교에서는 모든 사람이 신 앞에서 평등했다.
그러나 제국의 권력이 기독교와 결합하고 집권과 관료제가 발달하면서 사회-정치적 불평등이 가중되었다.
전제적이고 관료적인 군주제는 동방의 종교인 기독교와 함께 로마에 정착된다.
313년 콘스탄티누스의 기독교 공인, 392년 테오도시우스황제에 의한 기독교 국교화 과정은 정치적 권력의 강화와 사상억압 및 종교의 획일화를 뜻한다.
시민의 자유분방했던 문화가 교조적ᆞ관료적인 기독교 문화로 넘어가는 것이다.
로마제국의 기독교는 복음의 원시기독교와 다른 변질된 것을 말한다.
제국말기 기독교의 권력화와 변질은 로마가 망하고 난 다음 중세 기독교 세계의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전제적인 기독교 로마제국은 소리 없는 자유시민의 저항에 직면하고 마침내 로마를 분열과 파멸로 몰고 갔다.
지배체제를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 로마는 395년 제국을 둘로 분할하였다.
테오도시우스황제는 죽으면서 큰아들에게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를, 둘째 아들에게는 이탈리아의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로마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분열된 지 채 100년이 못되어 서로마의 권력은 사라지고(476)그 자리에 게르만인들의 부족국가가 난립하였다.
북쪽에서 게르만인들이 로마로 쳐들어왔을 때 지방의 로마인 권력자들은 이들에 대해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던 것이다.
「최자영지음, 그리스문화와 기독교, p25~26,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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