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파
■■■■■ 쿰란과 에세네파
기득권자에 반대하여 유대교를 개혁하고자 하는 움직임은 예수 이전에도 있었다.
서로 공동체 생활을 한다든지, 물질로 제사를 드리지 않고 기도와 세례[목욕재계]로 한다든지, 아니면 세례도 여러 번 하지 않고 정화의 상징으로 한 번만 하는 것 등이다.
예를 들면 사해부근의 쿰란 등 광야에서 분리된 공동체 생활을 했던 에세네파, 광야에서 설교한 세례 요한 등이 있다.
에세네파는 기원전2세기를 전후하여 그리스인의 셀레우코스왕조에 항거한 마카베오 가문의 독립전쟁 시기에 활약한 카시딤[경건한 무리:그 뿌리는 에즈라시대까지 올라감] 에게서 기원한다.
그 뒤 유대인이 형식적으로 독립하여 친그리스적 하스모니아 왕조(BC166~163년경)시대 여기에 협조한 사람들은 바리사이파가 되고 이들과 결별하고 떠난 사람들이 에세네파가 되었다.
에세네파 가운데는 그 율법을 존중하였으나 다른 유대인들, 특히 사두가이인들이 장악한 대사제직의 권위주으에 매우 적대적이었다.
에세네파는 로마에 항쟁하던 기원후 70년대에 벌어졌던 ‘최후의 마사다 결전’ 이후로 자취를 감추었다.
쿰란의 동굴들에서 고대 성경필 사본인 이른바 사해사본이 발견됨으로써 에세네파에 대한 것이 구체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이 사본은 기원전 250년경부터 기원후 70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해사본에 나타나는 사상은 일관성이 없지만, 그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공통점을 추출해 볼 수 있다.
쿰란인들은 스스로를 유대인과 구분되는 새로운 공동체로 생각하였다.
이들은 예루살렘 성전의 희생제를 거부하였으며, 스스로도 제단을 만들거나 동물ᆞ곡식ᆞ기름ᆞ포도주 등을 바치는 희생제를 드리지 않았다.
피의 희생 대신 그들은 자주 몸을 씻고[세례] 경건한 마음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가장 좋은 제사로 여겨 기도를 중시하였다.
공동체가 함께 드리는 기도는 물질을 대신하는 향기로운 제물이었다.
이들은 자급자족에다 노예를 갖지 않았으며, 전쟁무기는 절대로 생산하지 않았던 평화주의자들이었다.
인내심ᆞ경건함ᆞ형제애로 유명한 종파였다.
이 같은 점에서 에세네파는 뒷날의 예수파와 공통점이 많으나 율법주의 정통성을 지켰던 점에서 다르다.
또 광인ᆞ소경ᆞ바보ᆞ문둥병자 등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에세네파는 신비주의와 금욕을 지향하고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
결혼을 나쁜 것으로 여기지는 않았으나 여성을 믿지 않았으며 화평을 지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외부에서 아이들과 ‘인생의 거친 바다와의 싸움에서 지친’ 사람들을 받아들였다.
세속재물은 공동관리하고 채식과 금주를 실천하였다.
에세네파는 육체의 부활은 믿지 않았으나 영혼의 전생(前生)을 마술ᆞ신비주의를 숭배했다.
육체의 감옥에 갇힌 영혼이 육체의 사슬을 벗어나면 자유화 영생을 얻는다는 것이다.
이들은 선과 악이라는 두 영(靈)의 이원론적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선과 악이 싸우다가 마침내 빛이 암흑을 완전히 이긴다는 것인데, 이것은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최자영지음, 그리스문화와 기독교,p113~116,신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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