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왜 해요? 행복 하려고요.
사랑하고 싶으시죠? 구원받으시려는 거예요. 불행에서 벗어나려고요.
그리고 그 느낌은 자존감의 느낌이에요. 내가 주인공이 됐다는 느낌이죠.
만약 어떤 사람을 만났더니 내가 더 낮아져요.
내 삶이 더 비극적으로 변하고, 완전히 조연 중의 막장 조연이 될 때 우린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그러니 사랑을 할 때 일종의 신분 상승을 하는 것 같은 느낌도 있는 거예요.
저 사람을 만났더니 내 자존감이 올라가지 않을 때, 우리는 더 이상 그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 거예요.
내 자존감이 조금은 더 올라가야 된다는 게 사랑의 기준이죠.
둘의 경험을 하게 되면, 아무것도 안 가진 내가 이 세상의 모든 걸 가진 사람처럼 되죠.
그 남자를 만났을 때, 나는 여자 주인공이 돼요.
내가 지금까지 어찌 살아왔던지, 나의 학력이 어떤지, 나의 지적인 능력이 어떤지 상관없이 나를 여자 주인공으로 만들어요.
저 사람이랑 같이 있으니 나는 드디어 삶을 살아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죠. 주인공이 된 것이니까요.
조연의 삶은 힘들죠. 다른 사람 눈치 봐야 되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을 만나니까 내가 주인공이 되는 거예요.
얼마나 매력적이에요? 그러니 그 사람한테 목숨을 걸지요. 그 사람이 없으면 나는 주인공에서 또 조연으로 떨어져요.
그것도 심하게 비중 없는 조연으로요. 붙잡아야죠. 그 사람을 잡고 있어야 유지되거든요.
사랑은 이렇게 시작되는 겁니다.
사랑의 바닥에는 이런 놀라운 이기심이 있어요. 그 사람을 사랑하는 이유는 내가 행복해서예요.
그래서 황지우 시인이 시에 이렇게 썼죠.
“이타심은 이기심이다.”
여러분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왜 잘해 주는지 아세요?
이만큼 잘해 주는 여자, 이만큼 잘해 주는 남자가 없잖아요. 어디 가서 이런 호강을 해요.
이렇게 잘해 주면 그 인간이 딴 데 안 간단 말이에요.
그래서 잘해 주고 선물도 주는 거예요.
물론 사랑하는 사람에게 잘해 주지 않을 때가 와요. 사랑이 끝난 거죠.
닭 키우는 거랑 비슷해요. 내가 먹이를 더 이상 안 주는 거예요. 먹이를 주면 닭이 오고, 안 주면 안 오죠?
그런데 더 이상 모이를 안주는 내 자신을 발견했을 때에도, 머릿속에서는 그저 습관적으로 사랑한다고 생각하죠.
하지만 아니에요. 절대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그때가 되면 그 사람에게 사랑하지 않는다고 얘기 해야 됩니다.
그 사람도 그럴 수 있어요. 선물이 계속 오기는 오는데 어느 순간 선물이 뜸해질 때, 느낌이 오는 거죠.
더 이상 나에게 모이를 던져 주지 않아요. 내가 필요하지 않은 거죠.
이타심은 이기심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너에게 얼마나 헌신적이었는데 네가 날 떠나니?’ 라고 하지 마세요.
여러분들이 좋아서 한 거에요. 그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니 좋은 거죠.
세상에 저런 남자가 어디에 있어요? 친구들은 더치페이하자 그러는데 얘는 밥을 사줘요.
이런 대접을 받아 본 적 있나요? 심지어 짐도 들어 주잖아요. 오만 가지 호사를 누리죠.
여자 주인공이 된 거예요. 남자 주인공이 된 거고요. 그래서 우리가 사랑을 시작하는 거예요.
사랑에 빠진다는 건, 하나의 구원 같은 거죠.
그 남자, 그 여자를 만나기 전까지 우리는 힘들게 지냈다고요. 멸시 속에, 탄압 속에서요.
우리 각자는요, 너무나 보잘 것 없어요. 우리는 너무나 하대 받으며 살았어요.
‘왜 나는 태어났지?, 이런 생각도 하잖아요.
학교에서 선생님도 한 대 때리고, 어떤 분들은 왕따도 당하고요. 오만 가지 문제들을 겪잖아요.
우리는 한 번도 주인공이 된 적이 없어요. 그런데 어떤 사람이, 나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요.
나더러 태어나서 고맙대요. 너무 좋죠. 어머니에게는 ‘이걸 왜 내가 낳았지?’ 이런 얘기를 들었는데,
태어나 준 걸로 고맙다는 얘기를 들어요. 이런 게 사라지는데 왜 안 잡겠어요.
나에게 그 정도의 의미인데 붙잡죠.
사랑이란 건 그런 감정이에요.
그래서 집안이 불행한 사람은 빨리 사랑에 빠져요.
집이 개판이면 너무 힘들잖아요.
우리는 상대적인 동물이고 차이의 존재라서 조금만 나으면 그쪽으로 가거든요.
집이 행복한 사람은, 그 이상으로 해 주는 사람이 나오지 않으면 안 움직여요.
그러니까 집이 행복한 건 좋은 조건이에요. 실패를 안 하죠.
엘리자베스 테일러나 마릴린 먼로 같이 결혼을 많이 하는 사람들은 너무 힘들게 지내서 결혼을 많이 한 거예요.
A를 만났더니 너무 좋은 거예요. 사랑에 이르죠.
그런데 만나다 보니까 B가 등장하는 거예요. B가 더 잘해 주면 B로 갈아타요.
그럼 C가 등장해요. 갈아타는 이유가 그거죠.
아직 연애 못하고 결혼 못하고 마흔이 넘으신 분들 있으시죠? 이분들은 부모님을 원망해야 됩니다.
부모님이 자존감과 행복의 기준을 너무 많이 높여 놓은 거예요.
아이가 생기면 진짜 사랑을 줘서 키우세요.
그래야 얘가 데리고 들어오는 남자나 여자 수준이 굉장히 높을 거예요.
여러분이 애인을 데리고 갔더니 부모님이 ‘난 이 결혼 반댈세!’ 라고 하시면, 그건 100퍼센트 부모님이 자초한 거예요.
다시 돌아오면, 우리가 사랑을 열망하는 건 행복 하려는 거예요.
주인공이 되어 보려는 거예요. 평생 조연으로 사실 거예요? 살아 있을 때 주인공이 되어 봐야죠.
사랑은 둘의 경험을 하는 것이라는 이 짧은 이야기를 잊지 마시고,
우리는 정말 사랑을 해 봤는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강신주 지음, 강신주의 다상담 1, p39~43, 동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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