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사랑과 性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휴먼스테인 2013. 12. 10. 11:20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알랭 바디우 Alain Badiou라는 철학자가 있어요.

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해요. 사랑은 둘의 경험이라고요.

이 세계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잖아요. 여러분은 둘의 경험을 해 본적이 있나요?

여기서 둘이라는 건 나와 그 사람이에요.

나와 그 사람, 두 사람이 남자 주인공, 여자 주인공이고 나머지는 다 조연인 것이 사랑이거든요.

기적적인 감정이죠. 이 세상을 살면서 우리가 유일하게 주인이 될 때가 사랑할 때잖아요.

사랑하고 싶으시죠? ‘남자를 안고 싶다’, 이런 거 말고요.

진짜 중요한 경험은 내가 주인공이 되는 경험을 하는 거예요.

내가 남자 주인공, 여자 주인공이 되는 거요.

그래서 사랑을 하게 되면, 여기 많은 사람들이 앉아 있어도 여러분 애인만 보이고 나머진 안 보여요.

그런데 만약 아무리 노력을 해도 상대방이 안 보이면, 그 사랑은 끝난 거죠.

사랑을 하면 잠실야구장에서도 애인을 찾을 수 있어요.

남자 친구에게 시험해 보세요. 못 찾을 거 같아요? 찾아요. 그 사람만 보이니까.

둘의 경험이라 그랬잖아요. 타인은 안 들어오죠.

둘의 경험을 한다는 건, 둘을 제외한 다른 것들이 들어오지 않는 다는 거예요.

가령 카페에서 싸울 때 있죠? ‘어떻게 그럴 수 있어? 어제 왜 안 나왔어?’ 이러는데,

상대방이 그럴 수 있어요. ‘조용히 해. 남이 듣잖아. 좀 조용히 얘기할래?’ 이러면 사랑이 끝난 거예요.

100퍼센트 끝난 거예요. 

그런데 그때 여러분들도 그런다고요.

맞아, 내가 너무 시끄럽네. 우리 조용히 이야기하자.’ 타인의 시선이 둘 사이에 들어온 거죠.

서로 사랑하는 부부가 싸움을 하면, 옆집을 의식하지 않아요.

옆집에서 소리를 지르겠죠. ‘그만 좀 잡시다!’

그 때 벽을 치는 거예요. ‘조용히 해. 이 새끼야!’ 이게 사랑이에요.

여러분은 주인공이고, 다른 사람들은 조연이죠.

주인공인데 조연을 왜 신경 쓰겠어요?

 

알랭 바디우가 사랑은 둘의 경험이라고 한 건 바로 이 얘기를 한 거예요.

다른 게 개입이 되면 안 돼요. 이게 만만한 것이 아니에요.

둘의 경험을 한다는 건, 다른 사람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다른 사람 눈치를 보면, 그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거죠.

대학로에서 낮에 남자 친구에게 키스해 달라고 말해 보세요.

남자 친구가 여러분 손을 잡고 카페로 기어 들어간다면, 여러분을 사랑하는 게 아니에요.

바로 거기서 키스를 해야 돼요.

미풍양속을 해치는 것 같아요? (웃음) 미풍양속을 생각하면 사랑이 아니에요.

심지어 옛날에 낙랑 공주는 나라도 말아 먹었는데요? 사랑의 힘이에요.

조선조 왕이었던 영조의 어머니가 무수리거든요. 무수리가 뭔지 아세요?

후궁이 아니에요. 후궁 배 닦아 주고 안마해 주는 여자예요.

왜 영조의 아버지였던 숙종이 무수리를 건드렸는지 아직도 수수께끼예요. 후궁들도 많거든요.

하지만 숙종과 영조의 어머니, 그 두 사람이 같은 방에 있었을 때 무수리와 왕이라는 구분이 있었을 까요?

만약에 숙종이 갑자기 , 오버하지 마. 너 무수리야이러면 사랑이 끝난 거죠.

숙종이 자꾸 왕으로 보이면 사랑은 끝난 거예요.

정치적 상황, 경제적 조건, 오만 가지 것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아야 해요.

그런 과정이 분명히 있었을 거예요. 그게 얼마만큼 지속되느냐의 문제죠.

우리는 그걸 사랑이라고 부르거든요.

둘을 제외하고 다른 게 또 어떤 것들이 들어올 수 있죠? 돈이 들어올 수 있죠.

이런 조건들이 들어오면 둘의 경험이라는 규칙이 깨지는 거예요.

만약에 내 남자 친구의 연봉이 6,000만 원이에요.

돈을 이렇게 잘 버니 우리는 상대방의 좋은 점을 찾아요. 어떻게든 찾게 돼요.

그리고 연애를 하고 결혼도 할 수 있죠.

내가 속물이라는 걸 잘 아는 친구들은 이렇게 물어보겠죠.

그 사람 연봉이 6,000만 원이라 사귀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이야기를 하잖아요.

그건 중요한 게 아니고 사람이 참 좋다고요.

그런데 이게 정말인지 아닌지는 나중에 가 봐야 알아요.

높은 연봉을 받았던 상대방이 정리 해고를 당했을 때 알 수 있죠.

그 때 우리는 직감합니다. ‘나는 이 사람이 돈이 없으니까 끝내는 거구나.’

그 사람과 나 말고, 돈이 들어온다는 거예요.

돈을 거부하고 사람을 만날 수 있어요? 돈도 배제해야 하는 거예요.

사랑이 둘의 경험이라는 바디우의 이야기는 엄격한 잣대예요.

 

나이도 제3의 영역이에요.

나보코프 Vladimir Nabokov가 쓴 소설롤리타는 중년의 남자와 10대 여자의 사랑 이야기죠.

여러분들은 이걸 이상하게 볼 거예요. 사랑을 모르니까요.

롤리타 콤플렉스라는 말 들어 보셨죠? 병이라는 거예요. 하지만 이건 병이 아니에요.

소설을 읽어 보세요. 그 남자에게 그 여자의 나이는 보이지 않아요.

나이도 안 보이는데, 외모가 보여요? 외모가 보일 것 같아요? 여러분들은 많이 보이죠? 그러니 힘든 거예요.

쭈글쭈글해지면 어떡할 건데요? 돈 없어지는 거랑 똑 같은 거예요. 이런 것들이 들어오면 안 되는 거죠.

상대방이 한 사람으로 다가와야 하는 거거든요.

사랑은 둘의 경험이라는 말, 이 엄격한 잣대로 본다면 저를 포함해서

우리 모두는 사랑한 적이 거의 없다는 놀라운 사실에 직면하게 되고 조금 당혹스러워집니다.

둘의 관계를 지키려면 주인공들이 발악을 해서 주인공으로 남아 있으려고 해야 해요.

어머니가 개입하고, 주변 사람들이 개입하고, 경제적 상황과 오만 가지 것들이 개입할 때 우리는 싸워 이길 수 있을까요?

이게 여러분들이 고민을 해 보야 되는 문제인 거죠.

그러면 결혼은 둘의 경험을 하는 걸까요?

결혼이 둘을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제도일까요?

결혼식을 하려면 그 전에 상견례를 먼저 하잖아요.

그러면 이제 조연이었던 사람이 주연으로 올라오기 시작해요. 시어머니죠.

이러면서 사랑이 붕괴되는 거예요. 오만 가지 일들이 벌어져요. 

명절이 되면 아실 거예요. ‘진정한 주인공은 생면부지의 저 할머니가 분명하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여자 주인공이었는데 결혼을 하자마자 조연으로 강등돼요.

 

결혼과 사랑은 별개인 거죠.

문인들이나 인문학자들은 다 알아요.

결혼은 미친 짓이다라는 것을요.

결혼을 하면 우리가 주인공이 되기엔 상당히 안 좋은 요건들이 마련되는 거잖아요.

심지어 아이를 낳아봐요. 아이가 조연일까요?

부부끼리 저녁 먹다가 잠깐, 우리에게 아이가 있었지?’ 뭐 이런 사이에요? 아니죠. 가족이 되는 거예요.

 

사랑과 부합되는 결혼을 딱 하나 말씀 드릴게요.

호르헤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픽션들이라는 소설이 있어요.

이 보르헤스 집안의 특징이 유전적으로 4~50세가 넘으면 실명을 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보르헤스 소설은 감각적 이야기보다 굉장히 지적이고 상상력이 풍부한 이야기로 흐르죠.

그런데 보르헤스가 부인이랑 이혼을 합니다.

눈이 안 보이니까 이제 돌봐 주는 여자가 필요하잖아요.

그래서 비서를 뒀는데, 두 사람이 나이 차이가 꽤 났지만 사랑을 하게 되죠.

사랑이 가진, 스킨십이 가진 그 강렬한 느낌들이 있잖아요?

보르헤스는 그 비서랑 사랑을 할 때 이러한 느낌들을 느낄 수 있는 나이도 지난 때였어요.

그런데 보르헤스가 죽기 6개월 전에 그 비서와 결혼을 해요. 왜 결혼을 했을까요?

그는 자기의 모든 저작권과 재산을 그 여자에게 주고 싶었던 거예요.

딱 한 번, 결혼이 정당화될 때에요.

사랑하는 사람과 그냥 사세요.

그냥 살다가 상대방이 사랑스러우면 내가 죽은 다음에 편하게 살라고 혼인 신고를 하는 거예요.

보르헤스처럼. 하실 수 있겠어요?

여러분들은 거꾸로 하죠.

혼인신고를 해야 저 사람의 돈이 내 꺼다’,

시댁의 비호를 받아서 나도 유학을 간다’,

그 정도 되면 사랑은 아니에요.

그 정도 되면 거래죠.

 

사랑은 둘의 경험이다.

이게 만만한 게 아니죠.

둘의 경험을 유지하는 건 전투고 투쟁이에요.

스스로와도 싸워야 되죠.

자신을 둘러싼 모든 인간관계와 다 싸워야 돼요.

지구상에 둘만 있는 거예요.

 

『강신주 지음, 강신주의 다상담 1, p33~39, 동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