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동질화되는 만큼 타자 역시 동질화된다.
미국을 예로 들자면 한국인들의 생각 속에서는 미국=정부=사회=기업=미국시민이라는 등식이 성립된다.
‘미국 놈’, ‘미국 사람’, ‘미국 정부’, ‘미국 시민사회’가 똑 같은 이해관계를 지닌 하나의 단위로 간주된다.
거기서 이삼성의 표현대로 “한국 내 냉전세력과 미국 내 군사주의 세력간의 비대칭적 동맹” 을 읽어내기란 어렵다.
따라서 최근의 ‘검역주권’ 논란에서 보듯이 미국산 쇠고기 파동은 ‘한국 대 미국’이라는 국가단위의 대립으로써만 인식된다.
여기에서는 한국의 수입업자와 미국 축산농 간의 동질성은 은폐된다.
다시 말해 세계자본주의체제에서 주변부의 중심부와 중심부의 중심부가 이해관계를 같이할 가능성, 주변부의 주변부와 중심부의 주변부가 같은 이해관계를 가질 가능성은 숨겨진다.
민족/국민을 기준으로 한 선 긋기는 실제 이익의 경계선과는 실제로는 매우 다르다는 이야기다.
「권혁범지음, 민족주의는 죄악인가, p103, 생각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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