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과 이념은 처음에는 사람을 취하게 하지만 오래가지는 못한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질 때 서독의 전문가들은 동독의 엘리트층과 슈타지 같은 정보기관이 강하게 저항하지 않을까 우려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없었다. 그들은 너무나 무기력하게 무너졌다.
소련이 무너질 때 미국의 전문가들은 붉은 군대의 강경파가 미국을 향해 핵공격을 감행할 가능성을 우려했다. 그런데 그런 일은 없었다. 그들은 소련 영토 안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무기력하게 진압되었다.
북한도 조용히 무너졌다. 구심점이 사라지자 김씨 왕조의 엘리트층들은 해외로 도피하거나 신분을 감추고 잠적하기에 바빴다. 그토록 외쳐왔던 김씨 왕조에 대한 충성도, 남조선에 대한 적개심도 모두 공허한 구호였음이 드러났다. 아무도 김씨 정권과 운명을 같이하려 들지 않았고, 누구도 무력도발을 시도하지 않았다.
취했다 깬 인간은 제 살길을 찾기 바쁘다.
그래도 남한 사람들은 서독의 사례를 보고 배운 것이 있었다. 장벽 양쪽의 사람들이 해머를 들고 장벽을 함부로 부수게 놔둬서는 안된다는 것. 난민은 거지 떼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 그래서 그들은 휴전선을 유지했다. 이름만 ‘분계선’이라고 바꾸었다. 비무장지대도 그대로 두었고, 철조망도 지뢰도 제거하지 않았다.
북한 사람들도 동독의 사례를 보고 배운 것이 있었다. 기록을 남기면 엄청난 보복을 당한다는 것. 세절기로 자른 문서도 전문가들이 공을 들이면 복구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그들은 김씨 왕조 시절의 서류를 전부 불태워버렸다. 유엔 평화유지군이 그 땅에 들어오기 전에.
북한의 새 정권은 스스로 ‘통일과도정부’라는 이름을 붙였다.
‘통일’과 ‘과도’라는 단어에는 이런 메시지가 깔려 있었다.
‘남한 정부와 북한 인민은 우리를 도와야 한다. 그리고 우리의 어설픈 일 처리는 눈감아 줘야 한다.
통일과도정부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의 운명이 외부 세력에 달려 있음을 잘 알았다.
그들은 대량살상무기를 즉각 포기하며 핵과 관련해 모든 국제기구의 사찰을 받아들이겠다고 공표했다. 미국이 개입할 명분이 그렇게 상당 부분 사라졌다. 중국은 미국과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고 싶었다. 휴전선 위로 미군을 보내지 않고 압록강 아래로 인민해방군을 내려보내지 않기로 미국과 중국은 합의했다.
대한민국정부는 그런 협상 과정에 제대로 참여하지 못했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한국 외교의 승리’라고 우겼다. 북한 전문가들이 가장 이상적으로 여겼던 시나리오가 실현되었음은 분명했다.
김씨 왕조가 평화적으로 무너졌고, 국지전이 발발하지 않았고, 대규모 난민이 발생하지 않았고, 중국 군대가 북한에 주둔하거나 북한 일부가 중국에 편입되지도 않았다.
그 대신 북한에는 유엔평화유지군이 파견됐다. 평화유지군에는 네덜란드, 핀란드, 인도, 태국, 말레이시아, 몽골, 그리고 남한 군대가 참여했다. 남한 정부가 다국적군의 예산을 부담했다.
남한 정부는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지만, 갑작스러운 통일은 모두에게 재앙’이라고 남북 국민들을 설득했다. 남한 정부는 ‘전면적이면서도 점진적인 통합과정을 걸쳐 최종적으로 분계선을 없애고 완전 개방의 단계에 이를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렀다.
김씨 왕조 시절의 북한은 불량 국가, 막장 국가였다.
김씨 왕조가 붕괴된 뒤 북한은 좀비 국가가 되었다.
국가라는 탈을 간신히 쓴 약육강식의 무정부 사회였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북한을 멕시코, 콜롬비아, 온두라스에 비교했다.
치안이 제대로 유지되지 않는 나라.
엄청난 양의 마약을 만들어 수출하는 나라.
마약 카르텔이 부패한 정치인들과 결탁한 나라
사람들이 끊임없이 국경을 넘어 이웃 나라로 불법 이민을 시도하는 나라.
선진국 옆에 붙어 있는 최빈국.
동북아시아의 악성 종양.
몇 년 전까지 통일 전문가들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평가했던 시나리오가 현실이 되자. 아귀와 수라들의 축생도가 열렸다.
「장강명지음, 우리의소원은전쟁, p9~12 , ㈜위즈덤하우스」
'인문학 > 좋은 책 소개'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황금족쇄 (0) | 2020.06.26 |
---|---|
설렘이 번지는 파리 감성여행 (0) | 2018.01.17 |
밀양 전쟁 (0) | 2016.08.03 |
천국의 열쇠 (0) | 2016.07.30 |
동성 결혼은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가 (0) | 2016.07.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