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영 어린이의 동시집 <솔로강아지>(가문비, 2015)를 놓고 찧고 까부는 대부분은 신문과 인터넷에 올라온 ‘학원 가기 싫은 날’ 한 편을 보았거나, 덤으로 두어 편을 더 본 게 고작이다. 사정은 나도 같다. 여러 기사와 칼럼을 취합해본 결과, ‘잔혹 동시’라는 딱지를 붙일 수 있는 작품은 저 한 편이 유일하다. 그러나 내가 정작 끔찍하게 생각했던 것은 시가 아니라, 영어 조기교육에 부응하여 초등학교 저학년생이 읽는 동시집에 영어 번역을 나란히 실어놓은 극성이다. 엄마도 시인이라면서….
근대에 성립된 국민교육 제도는 개개인의 능력은 물론 각자의 재능이나 선호를 헤아리지 않는다. 학교란 균질한 교과과정을 통해 국민국가에 필요한 인력을 대량생산하는 제도로, 균질한 교과과정은 지식에 그치지 않고 감정 표현마저 나이(학년)에 맞게 강제한다. 이처럼 납작납작한 균질화 속에서는 아무도 ‘튀면’ 안 된다. 그 결과 학교는 천재·둔재(늦깎이)·괴짜·외톨이, 어느 것도 허용하지 않는 반(反)교육이 되어버렸다.
‘내 아이를 저 시로부터 지켜야겠다’는 사명감을 띠고서 출판사와 어린이의 부모에게 위력을 행사했던 학부모들은 위선적이다. 내 아이를 지켜야 할 데는 저 동시가 아니라, 온갖 학원을 전전해야만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는 ‘잔혹 교육’ 현장으로부터다. 하지만 이들은 ‘아이를 학원으로부터 구하는 어머니 모임’을 만들기는커녕, 내 두 눈을 가리면 괴수도 사라진다고 믿는 지극히 유아론적인 방도를 택했다.
문학평론가 김주연이 매우 주목할 만하다고 상찬했던 최기숙의 책은, 동화란 원래 어린이의 꿈이나 목소리를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어른의 욕망과 가치를 나타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기장수 설화다. 설화 속의 아기는 가족과 국가의 기반을 위협하기 때문에 도태되어야 한다. 지은이는 아동문학 자체가 어린이의 꿈을 거세하는 집단적·이데올로기적 검열의 형태이면서, 본래의 꿈을 잃고 현실에 순응해버린 성인들의 자해(自害)이자 자기 분신(어린이)에 대한 공갈이라고 말한다.
이순영 어린이의 동시 가운데는 엄마에 대한 적개심과 두려움이 투영된 시가 여럿 있다. “친구들과 내기를 했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말하기/ 티라노사우루스/ 지네/ 귀신, 천둥, 주사/ 내가 뭐라고 말했냐면 엄마/ 그러자 모두들 다 같이/ 우리 엄마 우리 엄마/ 엄마라는 말이 왜 이렇게 되었을까?”(‘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전통 사회의 양육 모형은 아버지가 엄한 역할을 맡고 어머니가 다독이는 엄부자모(嚴父慈母)다. 그런데 아버지를 직장에 빼앗긴 현대사회에서는 어머니가 양육의 모든 것을 도맡으면서 엄부의 역할마저 떠맡게 된다. 이런 양육 구조 속에서 아이는 가끔씩 나타나 사랑을 듬뿍 안겨주고 황망히 떠나는 아버지를 자애롭게 여기는 한편, 온종일 자신의 일거수일투족을 관리하고 감시하는 억척스러운 어머니를 미워하게 된다.
장정일의 독서일기 중에서 시사인 2015.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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