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립경제협회 회원이자 경제 저널리스트인 팀 하퍼드의 세계적 밀리언셀러 <경제학 콘서트 2>는 ‘망측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대충 ‘서구에서 특이한 성행위 양식이 늘어나는 이유가 뭐냐’이다.
하퍼드는 나름 탄탄한 경제 이론에 기반한 지적이고 대담한 답변을 내놓는다.
서구에서는 최근 후천성 면역결핍증(AIDS)이나 낙태고지법(미성년자의 낙태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도록 강제하는 법률) 등으로
‘일반적 성행위에 대한 위험(비용)’이 한층 높아졌다.
이 같은 위험(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합리적 선택’이 바로 ‘특이한 성행위’라는 것이다.
‘완벽하게 이기적인 개인이 합리적으로 자신의 이익(효용 극대화 및 비용 최소화)을 추구한다’는
신고전파 경제학의 인간관으로 은밀한 성행위 양식까지 설명한 사례다.
이 밖에도 하퍼드는 <경제학 콘서트> 시리즈를 통해 결혼과 이혼, 도박, 이사, 범죄, 직장 생활 등을 설명한다.
그야말로 경제학으로 인간 세상의 모든 것(every-thing) 혹은 거의 모든 것(almost everything)을 설명하려는 시도다.
심지어 출판사는 이 책을 읽으면 ‘불확실한 세상에서 손해 보지 않고 더 영리하게 살아가는 법’을 알 수 있다고 하니,
이쯤 되면 경제학이 처세술의 영역까지 넘보게 된 셈이다.
최근 <괴짜 경제학> <이코노믹 씽킹> 등 <경제학 콘서트>와 비슷한 시도를 하는 책이 연이어 발간되면서 하나의 장르를 형성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해 장하준 케임브리지 대학 교수는
지난 4월 영국에서 출간한 새 저서 <이코노믹스, 유저스 가이드(Economics, The User’s Guide)>에서
“경제학이 심각한 과대망상증에 사로잡혀 있는 듯하다”라고 면박을 주었다.
그에 따르면, 현대 경제학은 모든 것을 규명하겠다고 설치면서도 정작 경제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경제학자들은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전혀 예측하지 못했고, 이후 대안도 제시하지 못했다.
장하준 교수는 “경제학은 경제를 다뤄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결혼이나 성관계, 범죄가 아니라 생산과 분배, 소비, 기술, 국가(경제주체 중 하나인) 등 경제 문제부터 제대로 설명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경제학은 어쩌다 경제도 제대로 모르면서 모든 것을 설명하겠다고 나서는 ‘주제넘고 오만한’ 학문으로 전락했나?
장 교수는 “경제학이 스스로를 ‘과학’이라고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과학의 본래 의미는 ‘사물 뒤에 숨은 객관적 원리(진리)를 규명하는 작업’이다.
과학자는 일반인과 달리 세상의 숨겨진 진리를 꿰뚫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경제학자들이 세상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된 이유는 스스로를 ‘진리를 깨달은 자’로 규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 경우 경제학자는 세상의 번다한 이해관계로부터 독립적인 선지자이기도 하다.
진리는 이해관계 따위와 무관하게 확립되는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지식이니까.
장하준 교수는 이 지점을 공격한다.
그에 따르면, 경제 문제에서는 물리학이나 화학 등 자연과학과 달리 ‘하나의 답’ ‘하나의 객관적 진리’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경제 관련 논쟁 뒤에는 누군가의 이익이 숨어 있기 마련이라고 갈파한다.
심지어 “경제학을 대할 때는 다음과 같은 오래된 질문을 던져야 한다”.
“퀴 보노?(Qui bono?)”
‘Qui bono’는 ‘누가 이득을 보는가?’라는 의미의 라틴어다.
예컨대 ‘물 민영화’는 정교한 숫자와 복잡한 도식, 그리고 깔끔한 논리를 담은 경제 논문을 통해 주장되기 마련이다.
공기업이 아니라 민간 기업이 시장의 논리에 따라 물을 생산하고 판매하면
지금보다 훨씬 적정한 공급량과 합리적인 가격이 물에 매겨질 것이다.
이 논문의 숫자와 도식은 이해하기 힘들 만큼 과학적이고 객관적이다.
이에 장 교수는 “어떤 것(예컨대 물)을 시장에 끌어들일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 자체가 (과학이 아니라) 강력한 정치적 행위다”라고 주장한다.
이를테면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선진국들은 일제히 아동노동을 법률로 금지한다.
이는 아동을 노동 ‘시장’에서 배제한 일종의 경제적 결정이다. 그
러나 아동노동 금지는 해당 국가들에서 오랜 세월에 걸친 정치적 논쟁 끝에 내려진 정치적 결단이기도 했다.
이 같은 정치적 행위 이전의 아동노동은 시장에서 거래되는 ‘노동 상품’이었다.
그러나 이후 어린이를 고용하면 ‘시장 거래’가 아니라 범죄다.
마약 거래가 범죄인 것과 같다.
결국 경제와 정치는 따로 노는 별개의 영역이 아닌 것이다.
물도 마찬가지다.
“가령 물을 시장으로 끌어들이면, ‘1원-1표’의 원칙으로 (물의 가격, 공급량 등) 관련 결정을 내리게 된다.
이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그래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당연히 부자들이다.
반대로 물을 시장에서 배제하면, 적어도 이 부문에서는 돈이 힘을 발휘할 수가 없게 된다.”
신고전파의 ‘독재’, 오해받는 경제
그렇다면 ‘물 민영화’에서는 누가 이득을 보는가?
민영화된 물 기업(의 주식)을 사들여서 장사할 수 있는 부자들이다.
물 민영화에 대한 경제학적 논쟁은 결국,
물의 시장상품화로 손해 볼 수 있는 자와 이익 볼 수 있는 자 간에 경제학적 방법론들을 동원한 싸움이다.
장하준 교수는 단언한다.
“경제학은 정치적 논쟁이다(Economics is politics).”
지금까지 장하준 교수가 공격한 ‘스스로 과학인 줄 아는 경제학’이 바로 신고전파다.
사실 한국이나 미국에서 교육받은 시민들에게는 ‘경제학=신고전학파’의 등식이 성립한다.
대학의 경제학 커리큘럼에서 배우는 것이라고는 신고전학파밖에 없기 때문이다.
장 교수는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미국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유학 온 학생들이 케인스의 이름을 처음 듣는다고 해서 깜짝 놀란 적이 있다”
라고 말했다. 경제학이라는 영역에서 신고전파는 독재자다.
문제는 이런 독재가 세상에 유해하다는 것이다.
장하준 교수가 <이코노믹스, 유저스 가이드>에서 주장한 바에 따르면,
시민들은 신고전파의 독재로 말미암아 경제라는 대단히 풍부한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되었다.
본래 현실의 경제란 생산·소비·분배와 교환(시장), 노동, 기술, 국가 등으로 얽히고설킨 복잡한 영역이다.
신고전파가 주목하고 나름 유효하게 설명하는 부분은 경제 가운데 소비와 교환(시장)밖에 없다.
신고전파에게 ‘분배’는 교환만 잘 되면(시장이 제대로 돌아가면) 저절로 해결되는 부차적 문제다.
현실 세계에서 국가경제의 명운을 좌지우지하는 기술도 신고전파 경제학에서는 주요 변수가 아니다.
그런데도 신고전파 경제학자들은 ‘이게 전체(소비와 시장)이고 진리야’라며 자신만만하게 주장을 설파한다.
이에 시민과 정책 입안자들이 위압당한 결과를, 장 교수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시장은 경제 중 일부분에 불과하다.
신고전파는 시장을 경제와 동일시하면서 많은 문제들을 발생시켰다.
예컨대 교환(시장)만 보고 생산을 보지 않으니 일부 국가의 정책 입안자들은 자국 제조업의 퇴보를 본체만체하게 되었다.
개인을 생산자가 아닌 소비자로만 보니까 노동의 질(얼마나 흥미롭고 안전한지, 얼마나 스트레스를 주고 억압적인지) 문제나
‘노동과 여가의 균형’ 등은 관심 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심지어 상당수의 신고전파들은 다른 경제학들을 경제학으로 취급하지도 않는다.
그런 ‘이단(異端)파’ 중 한 사람인 장하준은 그러나 ‘신고전파 역시 훌륭한 경제학’이라고 인정한다.
오히려 특정 부문에서는 “고도의 정확성과 명확한 논리를 가졌다”라고 칭찬하기도 한다.
다만 신고전파에 대해 스스로 과학이자 진리이며 ‘유일 경제학’으로 자임해서 문제라고 지적할 뿐이다.
경제학도 칵테일처럼, “MIB 한잔 주세요”
그런데 이 같은 견해야말로 신고전파에 대한 장하준 교수의 복수다.
그가 <이코노믹스, 유저스 가이드>에서 시도하는 작업은,
신고전파를 황음무도한 독재자에서 평등한 시민 중 하나로 끌어내리는 것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학에는 신고전파 말고도 다양한 학파가 있다.
그리고 이런 학파들은 각자
“복잡한 현실의 서로 다른 면에 주목하면서 서로 다른 도덕적·정치적 가치판단을 적용하고 결국 서로 다른 결론을 내린다”.
그렇다면 시민들은 더 이상 신고전파 경제학에만 끌려다닐 필요가 없다.
다양한 경제학들을 두루 알고 이 가운데 자신의 상황에 적합한 경제학을 비판적으로 성찰할 능력을 갖추면 된다.
“경제학을 사용하라”는 주문이다.
< 이코노믹스, 유저스 가이드>에서 가장 흥미로운 부분 중 하나는 장하준 교수가 제시하는 ‘경제학 칵테일’이다.
여기서 그는 신고전주의 학파(N) 이외에 고전주의학파(C), 케인스주의(K), 마르크스주의(M)는 물론
한국 독자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오스트리아 학파(A), 개발주의(D), 제도학파(I), 슘페터주의(S),
비교적 최신 이론인 행동주의 학파(B)를 개괄하면서 각각의 강점과 약점을 명쾌하게 제시한다.
그러면서 독자에게 여러 맛있는 재료를 섞어 마시라고 권한다.
예컨대 자본주의의 활력과 생존 능력에 관한 다양한 견해를 맛보려면
CMSI(고전주의+마르크스주의+슘페터주의+제도주의) 칵테일,
자유시장을 옹호하는 견해는 CAN 칵테일,
시장 이외에도 경제에 중요한 것이 많다는 걸 배우려면 MIB 칵테일,
기업의 작동 원리를 배우고 싶다면 SIB 칵테일을 마시면 된다.
경고 사항도 있다.
이런 칵테일 재료 중 “하나만을 단독으로 섭취하는 것은 금물. 오만 등의 부작용으로 심하면 뇌사에 이를 수 있음”.
정확히 신고전파의 증상이다.
이 책에서 장하준 교수는 경제학은 쉬운 말로 잘 설명하기만 하면 그리 어려운 분야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경제학의 95%는 상식이다.”
또한 경제 문제의 정답이 여러 가지일 수 있다면, 한 사람(혹은 세력)의 경제학자를 맹신해서는 절대 안 된다고 말한다.
심지어 그는 독자들에게 장하준 자신도 믿지 말라고 경고한다.
“경제는 특정 전문가(경제학자)에게만 맡겨놓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책임 있는 시민이라면 모두 어느 정도 경제학적 지식을 갖춰야 한다.”
이를 위해 쓴 책이 바로 <이코노믹스, 유저스 가이드>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영국의 진보 성향 일간지 <가디언>은 이 책에 대한 서평에서
“과학이라 자처하는 경제학에 대한 강력한 보디블로(복싱에서 상대방의 배와 가슴을 타격하는 기술)이다.
전작인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 비해 더욱 진지하고 덜 쾌활하지만 비슷한 강도로 재미있다”라고 평가했다.
“이 책은 경제학 입문서, 참고서, 간략한 세계경제사로 모두 사용할 수 있지만 딱히 그중 하나의 장르라고 할 수는 없다.”
이 책의 출간 즈음 장하준 교수는 영국 월간지 <프로스펙트>가 매년 발표하는 ‘올해 세계의 사상가 50인’에서 9위에 올랐다.
이번 조사에서 1위에는 인도 경제학자 아마르티야 센이 올랐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서구 지식인 중 위르겐 하버마스, 나오미 클라인, 슬라보예 지젝은 각각 12위, 13위, 14위를 기록했다.
최근 미국에서 <21세기 자본론>을 출간해 세계적 명성을 얻은 프랑스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는 27위로 조사되었다.
「이종태기자,경제학 사용설명서 주의사항은 퀴 보노,p30~32,시사인 제352호(2014-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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