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시사인 2013.12.28
김세윤(방송작가)
멕시코시티에 처음 도착한 때를 기억한다.
그 공기, 그 냄새, 그 소음.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가장 ‘비현실적인 현실’이자 동시에 가장 ‘현실적인 비현실’이 나를 반겨주었다.
비로소 참 멀고도 낯선 곳에 와 있다는 걸 실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서른세 살 직장인의 라틴아메리카 배낭여행.
내가 욕심낼 수 있는 가장 먼 대륙을 딛고 서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낯선 풍경들과 맞닥뜨린 6개월.
쿠바의 아바나, 볼리비아의 우유니 사막을 거쳐 브라질까지.
다시 돌이켜봐도 참 대단했던 6개월. 그중 제일 인상적인 풍경이 뭐였냐고 사람들은 묻는다.
때론 우유니 사막, 때론 이구아수 폭포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미처 털어놓지 못한 ‘최고의 풍경’은 사실 따로 있다.
그것은 우유니 사막과 이구아수 폭포가 아니다.
우유니 사막과 이구아수 폭포 위에 서 있던 ‘나 자신’이다.
늘 상상만 하던 풍경의 일부가 되어 있는 나,
늘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스스로 사진의 일부가 되어 서 있는 나 말이다.
해보니까 결국 여행이란, 낯선 곳에서 낯선 것들에 감탄하려고 떠나는 게 아니었다.
감히 낯선 곳으로 달려가 용케 낯선 것들에 감탄하고 있는, 자기 자신에게 감동받으려고 떠나는 것이다.
불행히도 월터(벤 스틸러)는 아직 그런 종류의 감동을 한 번도 느껴보지 못했다.
여행을 가본 적도 없고 모험을 떠나본 적도 없다.
매일 익숙한 곳으로 출근해서 익숙한 것들만 매만지며 사는 샐러리맨.
대단한 잡지 <라이프>에서 가장 대단하지 않은 직원으로 16년을 일하는 동안,
잡지에 실린 사진의 네거티브 필름이 모두 그의 손을 거쳤다.
가장 극적인 삶의 증거들을 관리하는, 하나도 극적이지 않은 삶이었다.
그나마도 잡지는 폐간을 앞두었다.
전설의 잡지 마지막 호 표지는 전설의 사진작가 숀(숀 펜)이 맡았다.
그는 여느 때처럼 월터에게 필름을 보내며 이런 메모를 덧붙였다.
“꼭 25번 컷을 표지로 써주게. 25번 컷이야말로 ‘삶의 정수’가 담긴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라네.”
그런데… 아무리 뒤져봐도 25번 컷이 없다.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발행일까지 남은 시간은 3주. 그 안에 사진을 찾지 못하면 정리해고 1순위가 되고 말 터이니,
휴대전화도 없이 전 세계를 누비는 숀의 행방을 쫓아 팔자에도 없는 여행을 시작한 주인공.
그린란드에서, 아이슬란드에서, 또 히말라야에서…. 어느새 그 기막힌 풍경의 일부가 되어버린 샐러리맨.
그렇게 월터의 상상이 현실이 되기 시작한다. 난생처음 자기 자신에게 감동받기 시작한다.
2014년 첫 영화로 이 작품을 권한다
고백하건대, 영화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보는 2시간이 요 근래 가장 행복한 2시간이었다.
‘늘 사진으로만 보던 풍경 안으로 직접 걸어 들어가 스스로 사진의 일부가 되어 서 있는’ 월터를 보며
8년 전의 남미 여행을 새삼 추억할 수 있어서 행복했다.
낯선 것들에 감탄하려고 떠나는 여행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감동받으려고 떠나는’ 여행의 본질적 기쁨을
다시 그리워하게 만들어서 행복했다.
무엇보다, 단지 여행을 부추기고 모험을 응원하는 이야기만은 아니라서 더 행복했다.
뜻밖에도 이 영화는 ‘매일 익숙한 곳으로 출근해서 항상 익숙한 것들만 매만지며 사는 샐러리맨’의 인생도 제법 존경받을 만한 것이라고 말한다.
‘대단한 회사의 대단하지 않은 직원’으로 버틴 월터의 16년을 향해 가장 따뜻한 갈채를 보내고 있다.
특히 한때 종이 잡지에서 일해본 사람이라면, 아니, 청춘을 바친 어떤 공간이나 시간을 뒤로한 채 떠밀리듯 나이를 먹어온 사람이라면
모두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꽤나 뭉클할 것이다.
당신이 잃어버린 당신 인생의 25번 컷은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하게 될 것이다.
지인들에게 2014년의 첫 영화로 망설임 없이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를 권하게 될 것이다.
지금 내가 그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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