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울뱀을 조심하라
글 김낙훈 한국경제신문 중소기업전문기자
‘자유’아닌 ‘관리’ 무역협정
경기도에서 자동차부품을 만드는 중견기업 S사의 박 모 차장은 안주머니에 늘 사직서를 갖고 다닌다.
무능해서 사표를 내려는 게 아니다. 매사에 적극적이고 명철한 그는 최고경영자에게 총애 받는 간부 중 한 명이다.
그런데도 사직서를 휴대하고 있는 것은 일이 너무 고되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국내영업을 담당하고 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FTA(자유무역협정)’와 관련된 일까지 맡게 됐다.
이 일이 보통 복잡한 게 아니다. 특히 한미FTA가 발효되면서 일이 폭증하고 있다.
발주업체에 대한 미국 세관의 직접 조사가 예정되면서 발주업체의 요구사항이 홍수처럼 몰려들고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밤을 세운다고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점이다.
S사는 자동차부품의 1차 협력업체이지만 또 다시 수백 개의 2차 협력업체와 거래하고 있다.
이들에게서 수많은 자료를 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2차 협력업체들에게 미국 세관 조사에 대비한 서류와 증빙자료,
그리고 한미FTA가 무엇이고 조사의 핵심인 원산지증명이 무엇인지를 수없이 교육시켰지만
도무지 알아 듣지를 못하는 것이다.
이런 스트레스를 받는 것은 수천 개에 이르는 2차 중소협력업체 담당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도 그럴 것이 FTA는 단순히 FTA로 끝나는게 아니라 고등수학보다 복잡한 원산지증명을 알아야 한다.
FTA는 말이 ‘자유’무역협정이지 사실은 관세인한 대신에 미로처럼 복잡한 원산지 증명을 요구하는
‘관리’무역협정이기 때문이다.
예컨대 미국 세관은 섬유제품에 대한 원산지를 조사할 때
△원사,염색,날염 등 모든 생산단계의 시간경과
△단계별 생산자 이름 및 주소
△각 생산단계별 수출자의 운송관련 서류
△직물 생산에 사용된 각각의 섬유의 구매처와 생산자 이름과 주소 및 기술
△각각의 생산일지와 송품장, 대금지급증명 선적서류 및 재고서류
△생산 직기의 대수
△생산원가 자료 등을 요구한다.
뿐만 아니라 원산지 판별 기준이 미적분처럼 복잡하다.
품목마다 기준이 다르고 나라별 기준도 제각각 이다.
그러니 사무직원 1~2명이 자금•회계•경리•인사 등 10여 가지 일을 보는 중소기업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라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원산지 문제 전문가인 법무법인 율촌의 김의기 고문이 원산지 규정을
‘이집트의 상형문자 같다’고 표현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덤터기는 모두 중소기업이 짊어져
왜 이렇게 복잡한가. 각국이 FTA를 체결하면서 말로는 자유무역을 외치지만
실상은 자국산업보호를 위해 그 뒤에 방울뱀을 감춰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뱀에 물리면 치명상을 입게 된다.
우루과이라운드Uruguay Round의 마무리 협상단계에서 각국의 대표단이 제네바에 모였다.
1993년 12월에 타결돼 1995년부터 발효된 우루과이라운드는 세계무역기구WTO를 출범시킨 협상이다.
이 자리에서 미국 대사는 우루과이협상 종결을 지지하는 발언을 했다.
“미국의 사막에는 방울뱀이 많이 있는데 조심하지 않으면 습격을 받게 됩니다.
제네바에 와서 보니 통상협상가들은 방울뱀보다 빨라서 소리도 내지 않고 바로 공격을 하던군요….”
<국제통상전문가 김의기 WTO에서 답하다> 中
마찬가지다. 한미FTA협상에서 미국은 자국에 예만한 제품에 대해서는
까다롭기 그지없는 원산지 규정을 만들어 적용하고 있다. 세관조사에서도 상황은 비슷하다.
무역으로 먹고 사는 한국에게 FTA는 중요하다.
하지만 협상 담당자들이 단순히 관세인하에만 매달린 채 뒤에 감춰진 방울뱀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면
그에 따른 덤터기(업무과중,비용증가 등)는 모두 중소기업이 짊어지게 된다.
때로는 이 덤터기가 단순한 업무 폭증을 넘어서 벌금이나 형사처벌로 연결될 수도 있다.
중소기업인들은 기업을 경영하면서 사기를 당하지 않으려고 부단히 애를 쓴다.
이상한 신기술에 현혹돼 단번에 수십~수백억 원을 날리는 수가 있고 그 결과 회사 문을 닫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정부 협상 담당자들은 모든 협상에서 방울뱀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래야 중소기업들의 짐을 하나라도 덜어줄 수 있을 것이다.
「글 김낙훈, 방울뱀을 조심하라,p66~67, 신용사회(2013.8.)」
'인문학 > 경영' 카테고리의 다른 글
히든 챔피언 Hidden Champion (0) | 2013.12.20 |
---|---|
인사人事가 만사萬事 (0) | 2013.12.20 |
‘빅 데이터’ 세계를 꿰뚫다 (0) | 2013.12.20 |
허드렛일부터 제대로 하라 (0) | 2013.12.19 |
배려가 있는 사람이 성공한다 (0) | 2013.12.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