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에서 중국, 일본, 남한, 북조선은 서로를 타자화한다. 그것은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나 타협을 힘들게 한다. 물론 “현상적으로는 첨예하게 충돌”하지만 “사유의 기본적 틀과 이데올로기적 전략을 공유한다는 점에서 적대적 공범관계”를 구성한다. 이렇게 타자화된 대상은 언제고 ‘우리’를 위한 도구로 수단화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선이고 가령 일본이나 미국은 악이라는 민족주의적 이분법은 유사시에 다른 민족억압 및 살인을 유발하고 정당화하는 이념적 정서적 기초가 될 수 있다.(반공주의도 이러한 이분법의 한 형태다.) 물론 한국은 제국주의국가가 아니고 다른 나라를 침략해본 적도 거의 없지만 일단 힘이 실리게 되면 한국의 민족주의도 공격적 민족주의로 전화될 수 있다.
민족 간에 적대적 관계가 없는 경우에도 단지 이러한 민족적 혹은 민족국가적 범주화는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말이 암시하듯이 자신의 집단이익을 우선시하고 타민족을 차별하는 태도를 자동적으로 생산한다. 한일관계처럼 적대적 과거가 있었을 때는 이러한 의식은 기억의 정치를 통하여 더욱 배가된다. 즉 정치심리적 메커니즘을 통하여 갈등의 잠재성과 그것의 전면적 폭발을 대비한 타자에 대한 ‘적대적 증오’의 문화적 훈련은 근대국가에서 공교육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어떤 의미에서는 민족을 축으로 한 근대국가의 ‘국사’ 교육은 전쟁을 준비하는 문화적 훈련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집단에 대한 증오와 파괴의 이념이 집단적 기억(collective memory)으로 지속” 된다. 그런 훈련의 결과 특히 전쟁 시에, 타민족에 대한 살인을 ‘우리 조국을 위한 고귀한 희생”으로 정당화하는 경향이 자리잡게 된다. 아무리 전쟁 시라도 인간에 대한 살인을 별다른 죄책감 없이 할 수 있는 것은 기억의 정치를 통해 ‘타자’를 비인간화(dehumanization)시키기 때문이다. 또한 제노사이드(인종학살, genocide)가 보여주듯이 살인자들에게 자신의 학살행위가 정당화될 수 있는 이유는 그러한 행위가 자신이 속한 국가의 ‘허가’를 통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은 국가의 명령을 받았을 뿐이며 집단학살도 국가의 허가에 따른 합법적 행위라고 믿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사회구성원에게 정치적 사회적 권리를 부여하는 민족국가는 오히려 바로 내이션을 기준으로 밖에 있는 ‘타민족’을 배타적으로 밀어내고 폭력적으로 그 권리를 침해하는 모순 속에 있다. 높은 수준의 인권보장과 민주주의의 정착에도 불구하고 서구사회에서 소수민족 혹은 종족에 대한 차별이 끊이지 않는 이유다. 이 타자화는 평상시에는 타민족의 차별, 위기 시에는 타민족/종족에 대한 제노사이드의 근거가 된다. 민족주의의 권역에서 ‘우리’는 “조국을 위해서 죽는 일로부터 조국을 위해서 죽이는”일에 이르기까지의 단계를 겪는다. 따라서 울리히 벨러의 단언처럼 민족주의가 가진 맹점은 “사회 내부적, 외교적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앤소니 스미스는 민족과 민족주의가 테러와 파괴에 기여하면서도 “현대 세계질서를 위한 유일한 현실적인 사회ㆍ문화적 틀을 제공한다” 고 주장한다. 하지만 민족과 타민족을 뚜렷하게 구분하는 논리와 감정은 두 세계의 충돌을 유발하며 충돌 시에 평화적으로 타협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근대의 대다수 전쟁은 ‘조국’과 ‘민족’의 생존이라는 명분으로 벌어진 일이다.
「권혁범지음, 민족주의는 죄악인가, p100~102, 생각의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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