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됩니다. 규정 위반입니다”라는 말 한마디를 못하고…
전두환 독재정권은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역대급 거짓말로 사건을 덮으려 했다. 그러나 어둠은 빛을 이길 수 없고 거짓은 진실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은 고귀한 역사의 교훈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세상에 묻힐 뻔했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추악한 거짓과 어둠을 뚫고 한줄기 빛처럼 세상에 그 진상이 드러난다. 직업윤리와 양심에 충실했던 의사·검사·기자·교도관·성직자들의 충실한 소명의식 덕분이었다.
가장 먼저 사고 현장으로 불려간 의사 오연상은 물고문을 직감하고 기자들에게 에둘러 발언함으로써 고문 가능성을 제시했다. 또 다른 의사 황적준은 경찰의 끈질긴 압박과 회유에도 불구하고 고문 흔적이 있다는 부검 결과를 발표한다.
정권의 수족처럼 여겨지는 검찰 내에도 양심적인 검사가 있었다. 경찰은 박종철의 시신을 화장함으로써 진실을 영원히 땅 속에 묻으려 했다. 경찰이 당시 공안부장이던 최환 검사에게 시신 화장을 요청했으나 그는 사체 보존 명령을 내린다. 또 다른 검사 이홍규는 <중앙일보> 신성호 기자에게 박종철의 사망 사실을 귀띔한다. 언론사의 사전 검열이 엄혹하던 시절,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한 그는 2단짜리 특종기사로 이를 세상에 알렸다.
전국은 한순간에 들끓었다. 박종철이 지핀 민주화의 불씨가 독재정권에 대한 분노로 속을 끓이던 시민들을 순식간에 타오르게 했다. 이게 전부가 아니었다. 사악한 정권은 고문치사를 은폐 축소했으나 이 또한 양심적인 교도관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에 의해 또다시 폭로된다.
이처럼 중요한 역사의 분기점에서 길목을 지켜선 전문가들이 권력에 굴복해 진실에 반하는 행동을 했다면 어떠했을까? 뒤틀린 역사의 격랑 속에서 얼마나 더 많은 시민들이 희생됐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의사로서의 당연한 본분(오연상)” “직업윤리에 따라 행동한 것일 뿐(황적준)” “직(職)을 걸고(최환)” “눈을 감을 수 없어(이홍규)”라고 당시를 회고했다(<중앙일보> 참조). 그들은 비범한 용기를 내세우지 않았다. 직업적 양심과 소명에 따라, 진실하게 직무를 수행했을 뿐이다. 이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충실하게 소임을 해낸 덕분에 이 땅의 민주주의는 뿌리를 내리고 성장해갈 수 있었다.
시사인 2017.02.04 문경란 서울연구원 초빙연구위원, 전 서울시 인권위원장의 글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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