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사람들이 생명과학에 걸고 있는 기대는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는 여기에도 큰 맹목성이 있죠. 사람들이 은근히 가장 원하는 것은 불멸이에요. 생명과학이 발달해서 어느 순간에 우리를 죽지 않게 만들지도 모른다는 기대 말입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에 우리가 죽지 않는 방법을 발견하면, 그게 모두가 죽는 순간입니다. 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이 엄청난 번식력 속에서 지구라는 요만한 땅덩어리가 살아남는 게 신기한 일이에요.
다윈은 수학을 무척 싫어한 사람이었죠. 그가 쓴 책들은 사실 자연과학책이라고 보기에는 너무도 정량적이지 못합니다. ≪종의 기원≫을 보면 그런 그가 애써 계산문제 하나를 푼 게 있습니다. 정확하게 기억해낼 수는 없지만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코끼리가 대개 30~90살 정도까지 번식을 한다고 하면 그 기간 동안 평균 6마리의 새끼를 낳게 되는데, 만일 태어난 새끼들이 모두 죽지 않고 다 번식한다면 750년 후에는 코끼리 한쌍으로부터 1,700만 마리의 코끼리가 태어날 것이라는 겁니다. 대단하죠.
하지만 생태학자 로버트 맥아더의 계산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는 20분에 한 번씩 둘로 분열되는 박테리아에게 먹이를 무한정 공급하고 일단 태어난 박테리아는 죽지 않는다고 가정하면, 불과 하루하고 반나절만 지나면 현미경으로 들여다봐야 겨우 보일 정도로 작은 박테리아의 살이 지구의 표면을 우리 정강이 반 이상을 덮을 만큼 늘어난다는 겁니다. 그 후 한 시간이면 확실하게 우리 키를 덮을 것이고, 몇천 년 후면 그 박테리아 살의 무게가 우주의 무게와 맞먹을 것이며 그 부피는 저 우주를 향해 빛의 속도 팽창할 것이랍니다. 생물의 번식력은 이처럼 어마어마한 겁니다. 누군가가 죽어주기 때문에 내가 살 수 있는 거죠. 죽음이 삶을 허락하는 겁니다. 그러니 모두가 죽지 않게 되는 날이 모두가 함께 죽기 시작하는 날이 되는 겁니다.
- 죽지 않을 방법을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영원한 꿈입니다. 이 욕망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까?
도정일 신화는 불명성에 대한 인간의 욕망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길가메시 서사시≫는 인류 최초의 서사시인데, 이 4,000년 전 수메르 이야기의 주제 가운데 하나가 ‘불명성’입니다. 주인공인 길가메시 왕은 친구 엔키두의 죽음에 큰 충격을 받고 죽지 않을 방법을 찾기 위해 긴 모험길에 나섭니다. 그는 “오, 친구여, 나도 언젠가 그대처럼 죽어 땅에서 영영 일어나지 못할 것인가”라고 읊조립니다. 기독교의 뿌리가 된 히브리 서사를 보면, 인간의 욕망은 크게 두 가지죠. 하나는 영생의 욕망이고, 다른 하나는 무한지식의 욕망입니다. 근대 서사에서도 마찬가집니다. 괴테의 파우스트 이야기를 보세요. 나는 무한히 오래 살고 싶다. 나는 무한히 많이 알고 싶다는 것이 파우스트의 욕망입니다. 이처럼 불멸성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것은 유한성을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죠.
생명공학이 현대인에게 제시하는 것 가운데 가장 매혹적인 부분, 누구도 감히 거절하기 어려운 부분은 영생에 대한 유혹일 겁니다. 인간이 마침내 유한성을 벗어던질 날이 곧 올 것이라는 희망이 생명과학과 생명공학에 대한 현대인의 기대를 부풀려놓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지구의 생명체 수용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차세대가 설자리가 없어지는 거죠. 인간이 태어나 죽지 않는다면 새로운 세대, 미래 세대가 탄생할 기회는 봉쇄되어버리는 거죠. 이미 있던 자들만 있어야 하는 겁니다. 있던 자들만 계속 있게 된다는 것은 다른 많은 가능성을 차단해버리는 일이죠. 다양성의 세계는 문을 닫게 됩니다. 생명의 리듬도 없어지고, 리듬이 없어지면 음악도 불가능해지죠.
최재천 만일 영원불멸의 비결을 발견한 다음 그 시점에 살고 있는 사람들 모두가 빠짐없이 불임수술을 받으면 일단 절멸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냥 그_대_로 영원히 있는 거죠. 문제는 ≪용감한 신세계≫에서 홀로 소마soma를 먹지 않았던 친구 같은 자가 한 사람이라도 있으면 안된다는 거죠. 누군가가 어디선가 야금야금 번식을 하기 시작하면 결국 모든 게 무너져내리게 되겠죠.
도정일 그런데 문제가 한두 개가 아닙니다. 오래 산다는 것은 나쁘지 않은 일 같지만, 새로 태어나는 세대가 없다면 늙은이들은 누가 먹여살립니까? 오래 살면서 동시에 생산력을 유지해야 하는데 이 생산력은 생식력과 떼놓을 수 없습니다.
혜택의 불평등이 제기하는 문제도 심각할 겁니다. 돈 있는 사람은 생명기술의 혜택으로 오래 살고 가난한 사람들은 적당히 살다가 죽으라면 사회는 뒤집어집니다. 수명을 연장할 기회를 얻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이 최 교수님 집으로 몰려가 불을 지르겠죠. 너만 오래 잘 먹고 잘 살 거냐, 나도 살고 싶다 하고 말이죠.
메멘토 모리, 인간의 한계를 긍정하라
최재천 이런 문제들에 대해 얼마 전 제가 ≪당신의 인생을 이모작하라≫라는 책을 써냈습니다. 앞으로 머지않은 장래에 사람들 대부분이 다 100세를 넘기는 시대가 올 것인데, 그렇게 되면 은퇴하고 살아야 하는 기간이 너무 길어지죠. 요즘 같은 ‘사오정, 오륙도’ 시대에는 자칫하면 은퇴한 후의 기간이 더 길수도 있어요. 그래서 저는 그 책에서 아예 우리 인생을 번식기reproductive period 50년과 번식후기post reproductive period 50년으로 나눠 인생 이모작을 하자고 주장해봤습니다. 번식후기를 미리미리 잘 준비하면 오히려 자식 양육의 부담을 안고 있는 번식기보다 훨씬 신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제 제안을 받아들여 다들 철저한 준비를 하신다면 구태여 저의 집에 몰려와 불을 지를 이유도 없겠죠. 우리 인간의 불멸의 꿈이 어느 정도 현실로 다가오기 시작하면 번식후기가 그만큼 더 길어집니다. 상당히 골치 아파지겠죠.
- 불멸의 꿈이 인간 본연의 욕망이라면 인문학은 그 욕망에 대해 무슨 말을 합니까? 인문학이 인간에 대한 사유인 이상 뭐라 좋은 말 좀 해야 하지 않나요? 도 선생님께서는 신화 전문가이기도 하시니까 신화가 가르치는 지혜 같은 게 있을 법한데요?
도정일 이 대담이 인문학과 생물학의 대화죠? 인문학의 가르침이라기보다는 생각할 거리로 제시할 것은 많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무당 시빌sybil은 아폴론 욕정에 응해주는 대가로 영생을 약속 받습니다. 그런데 이 여자는 ‘영생’만 원했지 ‘젊은 몸’으로 영생해야 한다는 조건은 빼먹습니다. 한 500년, 아니 한 1,000년쯤 살긴 사는데 몸은 쪼그라들고 말라비틀어지죠. 그런 꼴로 사느니 죽고 싶지만 영생을 보장받았으니 죽을 수도 없어요. 산속 동굴에 숨어들어 비참하게 사는데, 동네 아이들이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묻습니다. “시빌아, 시빌아, 이제 너는 무엇을 원하니?” 시빌이 대답합니다. “나는 죽고 싶다.”
신화서사에 나오는 영생 추구의 이야기들은 예외 없이 실패의 이야기입니다. 에덴 동산에 있었다는 그 생명의 나무와 지식의 나무는 인간이 접근할 수 없도록 금지령이 내려진 나무입니다. 인간은 영원한 삶과 무한한 지식을 갖고 싶은 욕망을 품지만, 그건 충족시킬 수 없는 금지된 욕망이라는 이야기죠. 얻을 수 없는 것은 ‘금지된 것’으로 설정하는 것이 히브리 서사의 특징입니다. 인간에게서 근원적으로 박탈된 것, 그래서 그것을 추구할 때 부딪힐 수밖에 없는 근본적 한계를 보여주고, 그 한계 너머의 영토를 기웃거리지 말라고 가르치는 것이 히브리 서사의 지혜이죠. 그러나 금지된 것으로 향하는 게 인간 욕망의 특징이라서 욕망 추구와 실패의 이야기는 끊이질 않습니다.
파우스트 이야기도 사실은 에덴 서사의 근대판 변주입니다. 파우스트는 무한히 살고 싶고 무한히 알고 싶은 욕망이 인간의 근원적 한계 때문에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알죠. 좌절한 그는 자살을 기도합니다. 그때 악마 메피스토펠레스가 나타나죠. 파우스트는 무한지식을 얻는 조건으로 악마에게 혼을 팔아넘깁니다. 그러나 결국은 실패하죠. 수메르 서사의 길가메시도 영생의 나무를 얻었다가 도중에 잃어버리고 빈손으로 돌아옵니다. 빈손으로 귀환해야 하는 인간, 그걸 보여주는 것이 이 고대 서사시의 지혜입니다.
인간의 한계와 유한성에 대한 인식이 사실은 서양 인문학의 본원적인 기조입니다. “너 자신을 알라”는 것은 소크라테스의 말이기 전에 아폴론신전의 명령인데,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은 ‘인간아, 너는 신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것을 알아라’는 겁니다. 근대 과학은 무한지식을 추구했는데 그 근대 시기에도 인문학은 몇몇 예외적 사상가들을 빼고는 대체로 인간의 한계를 환기시켜왔습니다. ‘해골바가지’가 그 한계를 환기시키는 근대 인문학의 대표적 표상이죠. “죽음을 기억하라memento mori”는 메시지가 담긴 표상이죠.
「도정일ㆍ최재천 지음, 인문학과 자연과학이 만나다,p123~124,㈜휴머니스트출판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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