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9년 3월 문경보통학교(초등학교) 교사로 있던 박정희(당시 23세, 일본 명은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는 나이가 많아서 일본군 만주 신경군관학교(2년제)에 입학이 어렵게 되자(20세까지만 가능) 손가락을 잘라 ‘진충보국멸사봉공盡忠保國滅私奉公, 즉 “충성을 다해 일본에 보답하고, 견마(犬馬=개와 말)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며 일왕에게 바치는 충성혈서忠誠血書를 써서 만주신경군관학교로 보내 입학 허가를 받아냈고, 졸업식 때 수석 졸업자 연설에서 “대동아공영권을 성공시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사쿠라처럼 죽겠다”고 강조했는데 일제 하 35년간 그 많은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 지망생 중 혈서로 일왕에 맹세한 경우는 ‘다카키 마사오’ 교사가 유일무이한 경우다.
만주신경군관학교에서 3등 안으로 졸업한 생도들에게 일본 정규 육사편입 특전을 줌에 따라 일본 육사 3년생으로 편입했던 ‘다카키 마사오’소위는 졸업 후 관동군 23사단 72연대 소대장이 된다. 그때까지도 자신의 이름에 불만이 많던 ‘다카키 마사오’ 소위는 당시 일본 연대장 오카모토(대좌=대령)의 성을 본 따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또다시 개명한다. 조선인(조센징)이 창씨개명한 냄새가 나는 ‘다카키 마사오(다카키高木란 성은 고령 박씨에서 따왔고 마사오正雄란 이름은 정희正熙를 변용한 것)’보다는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가 창씨개명을 의심받지 않은 진짜 일본 이름이었다. 이렇게라도 해서 한국인의 흔적을 지워보려는 몸부림이었으니 진짜 친일파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주에 주둔 중 ‘오카모토 미노루’ 소위는 소대장으로 독립군(당시 중공 팔로군 소속)소통 작전에 무려 110회나 출전, 혁혁한 공로로 중위로 진급한다. 그 후 악질 친일파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간도토벌대’에 소속돼 중대장으로 더욱 큰 공을 세웠으니 그로 인한 애국지사들의 희생은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이때 조센징 중대장이 이끄는 일본군에 사살당한 독립군 전사들은 마지막 숨을 거둘 때 ‘이 민족반역자!’ 하고 절규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오죽했으면 일본 육군사관학교 교장 ‘나구모 쥬이치南雲忠一’장군은 “다카키 마사오 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이라는 점에서 보통의 일본인보다 훨씬 일본인다운 데가 있다”고 그의 의심할 수 없는 적극 친일 자세를 극찬했겠는가.
조선, 동아, 경향, MBC의 워싱턴 특파원을 역임했던 문명자 기자가 1972년 도쿄에서 어렵게 ‘다카키 마사오’와 함께 만주신경군관학교에서 생도로 있었던 일본인 장교 출신 두 명을 찾아 인터뷰한 내용을 보면 “… 조센징 다카키 마사오(박정희)는 하루 종일 같이 있어도 말 한마디 없는 음침한 성격이었다. 그런데 ‘내일 조센징 토벌 나간다’는 명령만 떨어지면 그렇게 말이 없던 자가 갑자기 ‘요오시(좋다)! 토벌이다!’하고 우뢰같이 고함을 치곤 했다. 그래서 우리 일본 생도들은 ‘저거 좀 돈 놈 아냐?’ 하고 쑥덕거렸던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김현철지음, 시대의 어둠을 밝힌다,p238~240,서울의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