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류 인플루엔자
방역 담당자들이 가금을 가스로 질식사시켜 땅에 파묻는, 섬뜩하기 이를 데 없는 장면을 이 행성에 연출한 장본인은 바이러스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독감을 유발하는 플루 바이러스, 즉 인플루엔자이다.
천연두, 흑사병, 콜레라 같은 전염병에 비하면 그저 며칠 앓아누우면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가벼운 병 취급을 받던 이 독감이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1918년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고 나서다.
당시 스페인만 언론 검열이 없어서 전염병 창궐 소식이 자유롭게 전해지는 바람에 그런 이름이 붙었지만 이 독감은 세계적인 대유행병이었다.
미국 캔자스 주 해스켈카운티의 미군 병사 주둔지에서 발생한 것으로 알려진 이 병은 1차 세계대전 말 병사들과 함께 이동하며 전 세계로 퍼져나가 5000만명에서 1억명을 죽였다.
인플루엔자는 1957년과 1968년에도 세계에 대유행병을 일으켜 각각 200만, 70만의 인명을 앗아갔다.
1918년에 비해 전 세계 인구가 4배 이상 불어난 지금 또다시 비슷한 수준의 대유행병이 번진다면 3억5000만~10억명이 사망하리라고 과학자들은 예측한다.
바이러스가 유발하는 전염병은 기후변화처럼 인간이 초래한 재앙일 가능성이 높다.
바이러스는 보수 성향이다. 좀처럼 숙주를 바꾸려는 시도를 하지 않는다.
사실 다른 숙주를 만날 기회조차 드물었다.
수백만 년 동안 한 숙주의 몸에서 평화롭게 살던 이 바이러스는 산업화와 세계화 과정에서 스트레스를 받았다.
벌목과 난개발로 숙주의 서식지가 줄어들면서 덩달아 멸종 위기에 몰렸다.
숙주와는 달리 유성생식을 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번식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 에일리언같은 생명체(생명체가 아니라는 견해도 있다)는 탈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들은 야생동물 밀거래, 자유무역을 틈타 새로운 숙주와 접촉을 늘려갔다.
그런 과정에서 인류에게 자기 이름을 가장 확실하게 알린 대악당은 에이즈 바이러스이다.
침팬지한테서 인간으로 옮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이 바이러스는 지금까지 2500만명 이상을 죽였다.
이 밖에 에볼라, 지카, 메르스 따위의 소악당들 역시 숲을 뛰쳐나와 유명해졌는데 그 뒤에서 인간계에 데뷔하려고 기다리는 줄이 끝도 없이 길다.
야생동물의 서식지는 지금도 계속 파괴되고 있기 때문이다.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바이러스가 종간 벽을 뛰어넘을 때 숙주는 큰 피해를 당한다.
인플루엔자는 조류와 돼지, 개, 말, 인간 등을 숙주로 삼는 바이러스이다.
이 바이러스가 지금처럼 가금과 인간을 피투성이로 만드는 악마로 변하기까지에는 몇 가지 조건이 맞아떨어져야 했다.
세계보건기구(WHO)의 전문가들은 중국 광둥성을 인플루엔자가 종간 벽을 뛰어넘을 가장 유력한 지역으로 보고 주목해왔다.
오래전부터 광둥성에서는 돼지·닭·오리가 조밀한 곳에서 북적대며 살아왔다.
네 다리 달린 것은 탁자 빼고 다 먹는다는 중국인의 유별난 식도락과 동종요법(질병 증상과 비슷한 증상을 유발시켜 치료하는 대체 의학) 신봉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세계에서 가장 큰 야생동물 거래 시장이 성업 중이었다. 야생동물과 가금이 함께 뒹구는 일도 흔했다.
광둥은 다른 쪽으로도 명성을 쌓아가기 시작했다.
세계 최고의 수출품 제조 지역으로 떠오른 것이다.
각종 장난감, 운동화, 스포츠 의류, 값싼 전자제품을 생산해 전 세계로 실어 날랐다.
인플루엔자 진화의 진원지로 의심받아온 지역이 세계에서 가장 기동력이 뛰어난 곳으로 변했다.
결국 1997년 광둥성에서 가까운 홍콩에서 어린 소년이 인플루엔자 변종인 H5N1에 감염돼 죽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H5N1은 종 도약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던 변종이다.
그런데도 종 도약을 이뤘다면 이론적으로는 녀석이 인간 독감 유전자와 재배열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이때부터 국제 공공의료 담당자들은 다시 치명적인 대유행병이 전 세계를 덮칠지 모른다는 악몽에 시달리게 되었다.
인플루엔자는 크게 A, B, C 세 종류로 나뉜다.
B와 C는 오랫동안 인간 집단 속에서 순환하며 길들여졌다.
수세기 전에 A형에서 갈라져 나온 듯하다.
C형이 통상 감기라고 부르는 질병의 원인이다.
B형은 특히 어린이와 노인이 많이 걸리는 전형적인 겨울 독감이다.
B형도 매년 많은 사람을 죽이지만 대유행병과는 무관하다.
문제는 A형이다. 아직 야생 상태이고 매우 위험하다.
물새와 오리류가 본래 고향인 놈들은 지금 다른 조류와 포유동물, 그리고 인간으로 횡단해가는 초기 단계에 있다.
시사인 2017.01.21 문정우의 활자의 영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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