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 촛불’, 과연 위대한 것일까
- 촛불시위인가, 촛불장사인가
‘위대한 100만 촛불’이라고 한다. 나는 1973년 유신 때부터 지금까지 40년 동안 데모해 왔다. 길거리에 나간 것만 해도 족히 수백 번은 넘을 것이다. 데모에는 변함없이 일관되는 법칙이 하나 있다. 소수가 참여하면 ‘불법’이고 다수가 참여하면 ‘시위’이며 최다수가 참여하면 ‘위대’라고 평가된다는 점이다.
나는 11월 12일 오후 1시부터 밤 10시 45분까지 서울 도심을 돌아다녔다. 숭례문을 시작으로 서울시청, 청계광장, 광화문, 종로1가, 인사동 입구, 세종회관 뒤편, 경복궁역 등이 나의 동선이었다. 나는 마지막 경복궁역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다.
조선일보, 한겨레를 비롯한 뉴스회사들과 주최 측은 ‘100만 촛불’이라고 하고, 경찰 측은 25만 명이라고 한다. 2008년 광우병 시위 때도 뉴스회사들과 주최 측은 100만이라고 한 반면 경찰은 8만 명이라고 했다.
참가 숫자가 중요한 것일까? 물론 중요하다. 아니, '가장 중요하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아무튼 이 날 시위로 박근혜 정권이 받은 타격은 치명적이라고 본다. 조만간 박근혜는 ‘2선 후퇴’ 하거나 또는 퇴진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박근혜가 퇴진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우리의 저항은 성공하는 것일까? 엄밀히 말해서 이것만으로는 성공도 아니고 실패도 아니다. 흔한 말로 ‘절반의 성공’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은 사실 ‘절반의 실패’와 같은 말이다. 나는 박근혜 퇴진 다음의 역사가 한층 더 중요하다고 본다.
11월 12일의 저항은 ‘절반의 성공’이자 ‘절반의 실패’라는 것이 나의 총평이다. 그런데 향후 예감이 그리 좋은 것은 아니다. 참고로 나는 가장 실패한 저항의 사례로 광우병 시위를 든다. 그것은 사람만 많이 모였을 뿐이지, 이명박의 ‘아침 이슬’ 사과와 주최 측 인사 몇을 국회의원 만들어 준 것 말고는 얻은 게 없다. 게다가 이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결론부터 말해서 나는 11월 12일의 시위가 유감스럽다. 만족스러운 것은 숫자뿐인데, 숫자는 말 그대로 숫자일 따름이다. 뉴스회사들과 주최 측은 ‘위대한 100만 촛불’이라고 입을 모은다. 내가 보기에 이 날 서울 거리 참여 인원은 냉정히 말해서 50~70만이다.
어쨌든 이상한 것이 하나 있다. 우리 국민은 숫자에 지나칠 정도로 비이성적이다. 숫자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일까?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면서도 숫자가 그리도 위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무언가 어폐가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작금의 한국 야당들이 싫다. 눈치만 살피다가 결정적 시간에 참여하는 척하는 야당 정치인들과 조우하는 것이 기분 나쁘다. 사람 하나 당 대형 노랑 깃발 하나씩을 들고 다니는 정의당원들은 아예 눈꼴사납다.
반북 데모 연설가이자 전 개그맨인 김제동을 만나는 것도 싫다. 그는 왜 그리도 모르면서 아는 체를 많이 하는 것인지? 또한 영어로 ‘노 웨이, 노 웨이’를 연발하는 인기 가수들의 위로 노래에도 나는 위로는커녕 심기만 불편해진다.
법원은 분명히 청와대 도로의 행진을 허용했다. 그럼에도 경찰은 청와대로 가는 도로 길목을 버스와 차벽으로 막았다. 이것은 불법점유 아닌가? 심지어 경찰은 지하철 입구까지 차단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것은 더욱 심각한 불법이다. 이에 항의하기 위해 시민이 버스 위에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아니 차벽을 넘어뜨려야 정상이었다.
현장중계를 하는 <오마이뉴스>의 한 여기자는 ‘위대한 100만 촛불’에다 ‘폭력은 안 된다’는 말을 네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었다. 만약 촛불집회가 연중행사가 된다면 아마도 오마이뉴스는 대성업할 것이다. 게다가 그 여기자(장윤선)는 2012년 이래 통합진보당을 가장 극렬하게 모해해 온 이른바 ’유빠‘ 기자임을 나는 알고 있다. 하지만 덩달아 거리의 사람들은 ‘비폭력’ ‘비폭력’을 외쳤다.
버스 지붕에 오르는 것은 폭력도 아닐 뿐더러 불법에 저항하는 것은 최소한 ‘물리력’이라고 해야지 폭력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러려면 안중근과 윤봉길도 폭력이라고 해야 한다. ‘비폭력, 비폭력’을 외치던 사람들이 난데없이 애국가를 제창(?)하기 시작했다. 나는 자리를 뜨기로 했다.
“여러분, 다음 주에도 촛불에 또 나오실 거지요?”
주최 측의 멘트가 귓전에 맴돌고 있었다. 우리는 임진왜란 피난길 왕의 행렬을 물리력으로 가로막은 조선 백성을 나쁘게 보지 않는다. 식민지 시대 이래 우리는 비폭력에 과도하게 순치되어 있다. 집에 오니 자정이 훨씬 넘어 있었다. 나는 경기도 이름 없는 위성도시에 살고 있다. 씁쓸한 귀갓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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