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물이 자기 영역을 지키려는 것처럼,
인간도 자신의 사적 공간이 침해를 받았다고 느끼면 평소와는 다른 반응을 보인다.
지극히 동물적인 반응이다.
밀집된 공간에서 자신의 영역을 더 이상 지킬 수 없을 때,
새끼를 죽이고 더 이상 교미를 하지 않고
서로 잡아 먹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동물들의 이상행동을
존 캘혼John B. Calhoun은 ‘행동 싱크behavioral sink’라고 정의한다.
여기서 ‘싱크’란 음식물 쓰레기를 받는 용기처럼
온갖 행동의 쓰레기가 모이는 것을 뜻한다.
가장 잡스러운 행동을 한다는 것이다.
인간도 마찬가지다. 밀집된 공간에 들어가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나는 앉을 자리도 없이 꽉 찬 아침 좌석버스가 가장 고통스럽다.
특히 겨울에 창문을 꽉 닫고 히터는 잔뜩 틀어놓았는데,
옆의 아저씨한테서 마늘 냄새나 아직 덜 깬 술 냄새가 풍겨오면 아주 미칠 지경이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최소한의 품격도 지킬 수 없는 좁은 공간에서 살게 되면 온갖 병리 현상이 나타난다.
이를 연구하는 ‘도시병리학’이라는 분야도 있다.
사적 공간을 박탈당한 개인이 보이는 병리적 현상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그러나 그 ‘머리카락도 별로 없고, 생긴 것도 음흉한 그 인간’처럼
자신의 권력을 공간의 크기로 확인하려 달려들면 분위기 정말 살벌해진다.
개인도 이렇게 무서운데, 집단이 그런 행동을 보이면 얼마나 살벌해질까?
실제로 그런 집단이 있다.
영토가 그리 좁지도 않고 별로 박탈당하지도 않았는데,
자신들의 공간이 유난히 좁고,
항상 타민족에게 영토를 빼앗기기만 했다고 생각하며 분노하던 나라가 있다.
바로 독일 민족이다.
독일의 국경은 수시로 변경되었다.
잦은 전쟁으로 승전과 패전을 반복했기 때문이다.
특히 제1차 세계대전의 패전은 뼈아팠다.
전쟁이 끝난 후 이뤄진 베르사유조약으로 인해,
독일은 해외 식민지를 모두 잃고 알자스로렌을 프랑스에 반납하는 등
영토의 13퍼센트를 잃었다.
물론 이 땅들 대부분은 이전의 전쟁에서 빼앗아 온 것이었다.
하지만 패전에 이은 경제적 어려움으로,
영토를 잃은 독일인들의 박탈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바로 이때 히틀러가 ‘레벤스라움(Lebensraum), 생활권’ 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타났다.
1924년 뮌헨 반란으로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집필한 『나의 투쟁』에서,
독일 민족은 유럽 전체를 독일의 레벤스라움,
즉 독일의 생활권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히틀러는 주장한다.
그가 사용한 레벤스라움이라는 개념은
19세기 말 독일의 지리학자 프리드리히 라첼 (Friedrich Ratzel)이
‘(Leben)생활’과 ‘(Raum)공간’을 합쳐 만든 조어다.
다윈의 진화론을 국가에도 적용해,
국가도 다른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충분히 먹고, 자고, 숨 쉴 수 있는 공간이 있어야
끊임없이 진화하고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레벤스라움이 히틀러의 용어가 되는 데는
칼 하우스호퍼Karl Haushofer라는 인물의 역할이 결정적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뮌헨 대학의 교수였던 하우스호퍼는
어릴 때부터 부친과 친구였던 라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다.
라첼과 마찬가지로 하우스호퍼도 국경은 생명체의 피부처럼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을 히틀러에게 전달한 사람은
후에 나치 독일의 2인자가 된 루돌프 헤스(Rudolf Hess)였다.
헤스는 뮌헨 대학 재학 당시, 하우스호퍼의 조교였다.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은 나치 독일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일본 제국주의를 합리화하는 이데올로기가 된다.
하우스호퍼는 독일과 일본을 왔다 갔다 하며,
두 나라의 제국주의가 닮은 꼴이 되도록 가교 역할을 했다.
하우스호퍼는 실제 일본이 한반도를 집어삼키기 바로 이전 해인
1909년에 일본에서 1년간 살았다.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들어가는 일본 제국주의의 전략을 지켜보며
자신의 레벤스라움 개념을 가다듬었다.
독일로 돌아온 하우스호퍼는 일본을 극동아시아 레벤스라움의 지배자로 찬양한다.
가는 곳마다 일본을 레벤스라움 이데올로기의 모범적 사례로 소개했다.
그의 활동에 감동한 일본은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을
일본 제국주의의 이론적 토대로 받아들였다.
그를 흉내 낸 개념도 만들었다.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이다.
일본의 대동아공영권은 히틀러가 부르짖은 레벤스라움의 변종이라는 이야기다.
이렇듯 히틀러의 레벤스라움은 지구 정반대편에 있는 한반도와도 이토록 깊은 관련이 있다.
그 당시에도 세상은 참으로 좁았다.
하우스호퍼를 통해 레벤스라움을 알게 된 히틀러는
이 개념을 자신의 나치 이데올로기에 바로 적용한다.
베르사유조약으로 영토를 빼앗긴 독일은 인구에 비해 영토가 형편없이 부족하다고 주장한다.
또한 자국민을 먹여 살릴 충분한 영토를 얻기 위해서는
폴란드, 우크라이나, 러시아에 사는 슬라브인들의 땅을 빼앗아야 한다고 선전한다.
그들은 독일의 아리안 민족에 비해 열등하기 때문에 그래도 된다는 것이었다.
이때 독일 영토가 지난 수백 년간 어떻게 줄어들었는가를 보여주는 하우스호퍼의 지도는
독일의 레벤스라움이라는 생명체가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아주 효과적인 선전 수단이었다.
히틀러의 레벤스라움 이데올로기에 영향을 미친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도 ‘공간(Raum)’을 이야기했다. 소설가 한스 그림(Hans Grimm)이다.
아프리카를 오가며 장사하는 상인이었던 그림은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독일에 눌러앉아 작가가 된다.
이때 그가 발표한 소설이 『공간 없는 민족(Volk ohne Raum』』이다.
1926년에 출판된 그의 소설은 당시 독일의 모든 사회문제는 ‘공간부족’때문이라는 내용이다.
따라서 독일이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공간 확장밖에는 해결책이 없다고 주장한다.
당시 독일인들에게 이처럼 인과관계가 명확한 설명은 없었다.
한스 그림의 소설을 히틀러가 사랑하고, 수시로 언급한 것은 당연했다.
공간 상실에 대한 강박으로 시작한 나치 독일은 또 다시 엄청난 공간 상실로 끝이 났다.
전쟁 후, 동쪽 국경이 오데르-나이세(Oder-Neisse)라인으로 그어졌다.
동프로이센을 포함한 독일 고유 영토로 여겨졌던 상당한 크기의 공간을 빼앗긴 것이다.
뿐만 아니다.
남은 독일 영토로 동독과 서독으로 나뉘어 승전국들의 관리를 받게 된다.
독일이 자기 국토를 다시 회복한 것은 채 30년도 되지 않는다.
독일 나치즘의 레벤스라움으로 인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공간에 관한 담론은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의 잔재라는 편견이 생겼다.
그 후 사회과학에서 공간은 더 이상 진지하게 다뤄지지 않는다.
내용이 영 우중충해서 전혀 폼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 빈자리에 ‘역사’와 ‘발전’이라는 시간에 관한 담론이 자리 잡는다.
마르크스주의야말로 역사와 발전의 개념을 통합한 가장 폼 나는 이론이었다.
물론 내가 대학에서 공부하던 시절의 아주 오래 전 이야기다.
한동안’시간’을 논해야만 폼 나는 시절이 계속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치에 협력했던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Sein und Zeit)』이
시간 담론의 한 축을 담당했다.
하이데거의 실존주의는 제한된 시간을 사는 불안한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성찰이다.
하우스호퍼의 레벤스라움은 나치 독일에만 영향을 미친 것이 아니다.
「김정운,에디톨로지 창조는 편집이다,p214~219,21세기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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