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고 보면 도움이 되는 내용
감독: 홍상수
배우:카세 료, 문소리, 서영화, 김의성, 윤여정
장르:드라마
등급:청소년 관람불가
시간:67분
개봉:9월 4일
시놉시스
몸이 아파 산으로 요양 갔던 어학원 강사 권(서영화)은 회복 후 서울로 돌아와 전에 일하던 어학원에 들른다. 그곳에서 그녀에게 온 편지들을 발견한 권은 2년 전 그녀에게 청혼을 거절당하고 일본으로 돌아간 일본인 강사 모리(카세 료)에게서 온 것임을 알게 된다. 모리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 권을 찾고 있었던 것. 모리의 편지를 읽던 권은 신선한 공기를 쐬려 어학원 계단을 내려오다가 손에 들고 있던 편지들을 계단 밑으로 떨어뜨린다. 흩어진 편지들을 줍던 권은 편지에 날짜가 없음을 깨닫지만 편지들이 쓰인 순서를 정확히 알 도리가 없다.
간단평
홍상수 감독의 16번째 장편영화 <자유의 언덕>은 사건의 연속성을 깨트리는 내러티브 형식을 통해 캐릭터의 일상을 조명한다. 권이 편지를 읽는 과정을 통해 전달되는 모리의 이야기는 비선형적으로 진행된다. 모리가 한국에서 경험하는 일화는 결말을 위한 과정이 아닌 온전하고 개별적인 기억으로서 더 그 빛을 발한다. 한편, 모리가 권을 만나게 되는지의 성공여부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동시에 각각의 일화를 안내하는 큰 틀이 된다. 따라서 <자유의 언덕>은 그 익숙하지 않은 형식에도 불구하고 흥미와 집중을 잃지 않는다. 매 신마다 새로운 단서를 제공하는 <자유의 언덕>은 현재의 상황이 모리의 과거 어디쯤 존재했을 지를 끊임없이 유추하도록 유혹한다. <자유의 언덕>은 앞으로 일어날 일보다 현재 눈앞의 상황이 무엇인지를 더 궁금하게 만드는 영화다.
글_최정인 기자(무비스트)
영화보고 나서
이동진의 리뷰
출처: http://blog.naver.com/lifeisntcool/220117374212
홍상수 감독의 9월4일 개봉작
'자유의 언덕'을 보았습니다.
(글이 좀 깁니다.)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최근작으로 올수록 점점 더 쓸쓸해지고 있고 점점 더 냉소로부터 멀어지고 있습니다.
그런 경향이 경유하는 현재를 보여주는 듯한 '자유의 언덕'은 아름답고 쓸쓸하면서 이상한 동화 같은 영화입니다.
(이전과 달리, '존경한다'는 대사가 뒤틀림 없이 사용되고 '괜찮으세요?"라는 말이 뭉클한 느낌으로 들어가 있는 홍상수의 이 신작이 남기는 감정적 여진은 무척 깁니다.)
이때 동화라는 말은 어떤 지향점을 잃고 싶지 않은 마음의 뒷걸음질 같은 픽션적 성격과도 무관하진 않습니다.
안온한 체념과 정직한 성찰의 분위기가 묘하게 공존하는 이 영화는 카세 료라는 배우가 지닌 독특한 느낌 때문에 더욱 짙은 여운을 남깁니다.
(문소리 김의성 윤여정 등 출연진들의 연기가 모두 홍상수의 세계에 잘 녹아들어 있지만, 여기서 카세 료의 모습은 좀더 특별한 존재감을 지닙니다.)
데뷔 이후 홍상수 감독은 시간이라는 변인의 영향력을 최소한으로 줄인 작품들을 만들어왔습니다.
온통 통념에 휘둘리는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관찰과 성찰이 그의 작품세계에서 핵심을 이루고 있다고 할 때, 가공할만한 자장을 가진 시간이라는 변인까지 함께 포함하게 되면 통념에 빠진 존재로서의 인간을 응시하려는 일종의 심리실험실적 창작 환경이 크게 휘둘릴 수 있기 때문이라고 저는 추측합니다.
그렇기에 그의 영화들은 끽해야 단 며칠 동안에 일어나는 일만을 다루고 있고, 시간이라는 변인의 가장 큰 소용돌이라고 할 수 있는 죽음은 작품 속에서 다루지 않고 있는 것일 겁니다. (원작이 있었던 데뷔작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만이 그 예외입니다.)
그런데 시간에 대한 홍상수 감독의 태도는 '옥희의 영화' 이후 변화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변화와 연관해서 무척이나 흥미롭게 다가오는 것이 바로 '자유의 언덕'입니다.
(이하 내용에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미 지난 주 수요일에 열렸던 '라이브 톡'을 통해
이 영화의 결말을 포함해 상세히 제 생각을 전해드렸으니 여기에도 어느 정도 적는 게 좋을 듯하네요.
그리고 당연히도, 아래의 내용은 이 영화에 대한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니, 그저 그렇게 볼 수도 있다는 정도로만 참고하시면 되겠습니다.)------
1.
'자유의 언덕'의 화법은 매우 특징적인 전제를 바탕으로 합니다.
우선 이를 세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도록 하죠.
2.
첫째는, 여주인공이 자신을 사랑하는 남주인공의 편지들을 읽다가 그걸 계단에서 떨어뜨려 편지 순서가 뒤죽박죽되는 바람에 시간의 맥락이 뒤틀린 채 영화 내용이 펼쳐진다는 전제입니다.
제가 보기에, 권이 흘려서 순서가 섞이게 된 이후의 편지뭉치 양은 모두 13장입니다.
(그중 한 장은 권이 끝내 읽지 못합니다.)
3.
시간 순서를 뒤튼다면 무엇보다 인과론적인 인식 과정이 영향을 받겠지요.
타인의 행동을 받아들이게 되는 과정을 예로 든다면, 과거의 관찰과 연계해서 현재의 행동이 지닌 의미를 파악하고 이어 그런 판단이 가닿은 예측으로서 미래의 그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결정되겠죠.
하지만 그런 인과론적 인식을 하게 만드는 시간의 순서가 뒤틀리게 되면 타인을 이해하게 되는 사고의 틀이 약화될 수밖에 없겠지요.
4.
언뜻 이런 설정은 시간의 영향력을 최대한 배제하려는 의도에 기반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의 순서를 뒤틀어서
(마치 무작위인 것처럼) 에피소드들을 늘어놓게 되면 관객들은 관람하는 내내 해당 에피소드들의 시간적 위치를 머리 속에서 짜맞추어 가면서 그 내용을 파악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인셉션'의 한 장면을 예로 들면,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요구하는 순간 사람들은 코끼리를 생각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시간적 틀을 뭉개는 방식으로 만들어낸 플롯이 인간이 시간적 틀 속에서 모든 것을 이해한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강력하게 상기시킨다고 할까요.
5.
홍상수 감독은 '자유의 언덕'을 촬영할 때 일단 전체 내용을 시간 순서대로 찍은 후 편집하는 과정에서 뒤섞인 상태로 만들어냈다고 밝힌 바 있지요.
그렇다면 감독 역시 시간적 이해의 강력한 틀 속에서 영화의 이야기를 만들어낸 후, 그런 인식의 습성이나 한계에 대해 관찰하는 방식으로 '자유의 언덕'을 창작해냈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이 영화는 통념과 가장 맹렬하게 싸워온 예술가인 홍상수가 인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통념의 틀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의 힘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건드려본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겁니다.
6.
그런데 이렇게 시간적 순서가 뒤섞이면 권이라는 여주인공은 편지에 서술된 모리라는 남주인공의 행동에 대해 과연 어떻게 달리 받아들이게 되는 걸까요. 제 생각엔 그 결과 권은 아마도 모리를 좀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판단했을 것 같습니다.
시간 순서가 섞이면 행위의 이유와 이해의 근거가 약화되면서 행위 자체만 좀더 강하게 각인되는 결과를 낳을 겁니다.
그 모든 일련의 과정을 순서대로 다 읽어냈다면 그의 '실수'에 대해서도 그나마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지만 그렇지 않다면 마음의 궤적과 전후 맥락이 상대적으로 무시되는 상황 속에서 그의 '배반'이란 행위만이 더욱 중요해지게 되겠지요.
이를테면, 시간을 뒤틀어버리면 비극성은 약화되고 (일종의) 희극성은 강화됩니다. 그리고 신뢰는 비극보다는 희극에 대해 좀더 마음을 닫게 되지요.
7.
이 영화의 두번째 전제는 권이 편지더미를 떨어뜨렸을 때 단지 순서가 뒤섞였을 뿐만 아니라 그 중 한 장이 빠져버린 것을 끝내 알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그렇게 사라진 한 장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었을까요.
8.
아마도 그 사라진 한 장에 담긴 내용은 이 영화의 에필로그일 것으로 저는 추측합니다.
이 영화의 에필로그는 권이 편지를 다 읽고난 이후의 지점에 부가적으로 붙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에필로그에 기술된 모리와 영선이 방의 안과 밖에서 따로 잤다가 깨어난 사건은 모리가 강아지를 찾아준 것에 영선이 감사하는 의미로 베푼 영화 초반의 술자리 장면 다음에 들어가야 할 편지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필 그런 에피소드를 담은 편지지가 빠져서 권이 읽지 못하는 것으로 설정되었을까요.
9.
그 에필로그 속에서 모리는 가장 신뢰할만한 사람이었습니다.
홍상수 영화들의 이전 남자 주인공 같았다면 모리는 자신에게 적극적으로 호감을 표시하기도 했고, 또한 상대나 자신이 대취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영선과 잠자리를 함께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장면에서 권을 깊이 사랑하며 애타게 찾는 중이었던 모리는 권에 대해 충실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지 않고 영선만 따로 자신의 방에서 재웁니다. 그리고 자신은 마당에 놓인 의자에서 밤을 지샙니다.
만일 권이 그 내용이 담긴 편지를 읽었다면(비록 나중엔 영선과 잠자리를 함께 하는 실수를 저지르지만)모리를 좀더 좋은 사람, 좀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볼 수 있었겠지요.
그런데 그 부분을 잃어버려 읽지 못했기에 권이 편지의 마지막에서 느끼는 절망감은 좀더 커질 수밖에 없겠지요.
10.
이야기의 세번째 전제는 모리가 서술한 편지에서의 사건들과 권이 그것을 읽게 된 상황 사이에 일주일간의 시차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기존 홍상수의 영화들에서 남녀가 엇갈리는 설정은 종종 발견할 수 있지만 그건 대부분 그들이 같은 시간에 같은 공간에 있으면서도 서로 엇갈려 눈치채지 못했거나 누군가가 모른 척 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자유의 언덕'은 일주일간의 시차를 액자 형식의 두가지 텍스트 속에 건너기 쉽지 않은 강처럼 흘려넣은 이야기입니다. 그 사이에 모리에게 일어난 사건을 생각하면서 볼 때, 일주일은 일련의 사건들과 그 영향이 완전히 종결되었다고 판단하기 어려운 시간이면서도 그렇다고 해서 권이 모리에게 아무렇지 않은 듯 다가가기는 어렵게 하는 시간의 양입니다. 그런 시간적 엇갈림 속에서 인물들이 놓인 딜레마는 극대화됩니다.
11.
그런데, 편지를 다 읽고난 권의 장면과 잠에서 깨어난 뒤 모리와 영선이 인사를 나누며 헤어지는 장면의 사이에는 두 개의 신이 더 들어가 있습니다. 하나는 권이 모리의 방에 들어가 있는 가운데 밖에서 모리와 게스트 하우스 사람들이 이별의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고, 또 하나는 이후 모리와 권이 맞이하는 행복한 앞날에 대해 동화적인 내레이션을 곁들여 설명하는 장면이죠. 그렇다면 이 두 장면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요.
12.
아마도 이 두 개의 신(두 개의 쇼트이기도 합니다)은 세 가지 중 하나로 파악할 수 있을 겁니다.
실제로 발생한 사실.
편지를 읽고난 권이 담배를 피우며 떠올리는 상상.
마지막 장면에서 모리가 잠에서 깨어나기 전에 꾸었던 꿈.
믈론 이 셋 중 어떤 것으로 봐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정답 같은 것은 없을 겁니다.
그건 이 영화를 만든 이의 의도도 아닐 것이구요. 하지만 '자유의 언덕'을 다 보고 나면 그 부분에 대해서 자꾸 곱씹어지는 게 사실일 겁니다.
13.
제 생각엔 이중 이 두 장면을 실제로 발생한 사실로 보기는 좀 어려울 듯싶습니다.
먼저, 모리의 잘못이 고스란히 적힌 편지를 권이 다 읽고났음을 고려할 때, 그 마지막 장면들에서 실로 오랜만에 재회하게 된 두 남녀 사이에 그 전까지의 사건들 및 그 사건들에 대한 고백이나 인지가 초래할 '감정적 불편함'이 전혀 없습니다. 그리고 그 부분에서 게스트하우스 주인(윤여정)은 모리를 떠나보내는 자리에서 일본 사람들을 선호하는 이유에 대해 "깨끗하고 예의발라서" 좋다고 밝히게 되는데, 모리와 그 주인은 이미 그런 견해에 대해서 상반되는 의견을 (충돌에 가깝게) 한참 주고받은 후의 일이기에 그 주인이 그를 따뜻하게 송별하는 과정에서 모리로부터 옳지 않다고 공박받은 그 말을 되풀이할 수는 없을 겁니다.
14.
그렇다면 권이 마지막 순간에 하는 상상이라면 어떨까요. 그건 제법 그럴 듯합니다.
권은 편지를 다 읽고나서 모리에게 실망한 상태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마음에 두고 있는 상황이기에 상상 속에서 모리와의 미래를 동화적으로 그려내고 싶어합니다.
이때 두 사람이 아들 딸 낳고 잘 살았다는 동화적 결말을 들려주는 장면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전에 모리와 게스트하우스 사람들이 이별의 말을 나누는 장면도 의미심장한데, 그 장면에서 모리는 존경받을 만한 사람이고 용기 있는 사람으로 거듭 치하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상상 속에서 권은 모리를 신뢰할 만한 사람으로 복원한 후 그와의 미래를 달콤하게 꾸려가는 해피엔딩으로 종지부를 찍고 싶어한다고 할까요.
15.
하지만 권의 상상으로 보기에는 약간의 난점이 있는 것도 사실일 듯합니다.
그게 권의 상상이라면 그 상상 속에서의 내레이션 주체가 (편지 내용이 아님에도) 모리라는 것이 걸릴 수밖에 없고, 또한 그게 권의 상상이라면 모리가 잠에서 깨는 바로 뒤의 장면과의 연결이 좀 어색해지기 때문입니다.
16.
그렇다면 그건 모리의 꿈인 것일까요. (이렇게 보면 권이 잃어버린 편지지 한 장에는 모리가 스스로 꾼 꿈에 대한 서술을 한 후에 잠에서 깨어나 영선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는 내용을 쓴 게 됩니다.)마지막 에필로그의 이야기 속 자리가 모리와 영선이 육체적 관계를 갖기 전의 상황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다시 말해 모리가 영선과의 관계를 진전시키지 않은 채 순수하게 권과의 재회를 애타게 바라고 있었었던 상황임을 생각하면, 게스트하우스 사람들과 우정어린 작별의 언사를 나누고 나서 권과의 행복한 미래를 꿈꾸는 꿈은 매우 그럴 법한 내용을 갖고 있습니다. 적어도 그 당시까지는 모리에게 영선과 실수로 자버리고 말았다는 자괴심과 자책감이 생길 수 없기에 그 꿈 속에서 자신을 좋은 사람으로 형상화하고 있는 것도 자연스럽죠. 그리고 그걸 꿈으로 파악하게 되면 모리가 잠에서 깨어나게 되는 다음 신의 시작 부분과 매끈하게 연결이 되는데, 홍상수는 영화 속에서 꿈을 묘사할 때 꿈을 꾸기 전에 잠드는 모습은 거의 묘사하지 않고, 대부분 꿈을 일단 보여준 뒤 거기서 깨어나는 모습을 붙이는 식으로 묘사한다는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습니다.
17.
그건 모리의 꿈일 수도 있고, 권의 상상일 수도 있습니다. 관객에 따라서는 실제 일어난 일로 볼 수도 있겠죠. (저는 모리의 꿈일 거라고 보지만 그걸 권의 상상으로 파악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합니다.)위에 제가 제법 긴 설명을 늘어놓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그에 대한 견해를 확정지어야지만 제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니까요.
18.
제게 '자유의 언덕'에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다가온 것은 극중 두 남녀가 묘사되는 (시간 순서상의) 마지막 자리입니다. 영화적으로는 영선과 모리가 대화하는 장면이 라스트신이 되지만, 이야기의 맥락으로 보게 되면 사실 그건 스토리의 한중간에 들어갈 내용이지요.
'자유의 언덕'에서 편지가 뒤섞이고 난 후 권이 읽게 되는 이야기의 마지막 부분이나 시간 순서대로 재배열해서 파악하게 될 때의 편지에 서술된 이야기의 실제 마지막 부분은 동일합니다.
그건 모두 모리가 문이 잠긴 화장실에 앉아서 생각에 잠겨 있는 모습이지요. (또한 그것은 이 영화 전체에서 시간 순서상 우리가 마지막으로 보게 되는 모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그 화장실 장면에서 모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요. 아마도 그건 게스트하우스에서 며칠 전에 보았던, 화장실에 있었기 때문에 봉변을 모면하게 된 어느 유부남의 처지가 아니었을까요.
19.
이때 강력하게 떠오르는 것은 홍상수 감독의 2002년작 '생활의 발견'의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 장면에서 남자주인공은 여자를 문밖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다가 천둥이 치면서 비가 쏟아져내리자 그 자리를 뜨게 되는데, 그건 그가 며칠 전에 무심히 흘려들었던 청평사 회전문에 대한 전설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생활의 발견'의 영어 제목은 'on the occasion of remembering the turning gate'입니다)
그때 '생활의 발견'의 주인공이 그랬던 것처럼 모리 역시 과거에 자신이 보았던 상황 속에 스스로를 대입하게 되고 자신의 행동을 객관화해서 성찰하게 되면서 딜레마에 빠진 스스로의 행동과 처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는 거지요.
20.
사실 홍상수의 영화들에서 마지막 장면은 많은 경우 남자 주인공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상황 속에서 고민에 빠진 채 우두커니 서있거나 천천히 걷는 모습을 보여주었죠.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 '생활의 발견' '북촌방향' '극장전' 등 적지 않은 영화들이 바로 그런 모습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21.
그런데 꼭 남자 주인공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옥희의 영화'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처럼 여자 주인공 역시 유사한 상황 속에서 마지막 모습을 보여주니까요. '자유의 언덕' 역시 마찬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이 영화 속에서 권의 마지막 모습은 편지를 다 읽고난 후 카페 바깥에서 담배를 피우면서 상념에 잠기는 모습이니까요.
22.
말하자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창작자로서 홍상수 감독은 그렇게 딜레마에 놓인 주인공이 삶의 특정지점에 붙박인 채 하염없이 생각에 잠기는 장면으로 영겁회귀하는 셈입니다. '자유의 언덕'에서는 남녀 주인공이 모두 그러해서 영화가 남기는 페이소스는 한층 더 짙어집니다. 저는 그런 장면들에 담긴 성찰이 홍상수 영화의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23.
액자 구조의 영화 속에서 모리에게 일어난 사건들의 시간적 맥락은 두 주인공에게 서로 다르게 제시되어 있습니다.
모리는 시간적인 맥락과 순서에 따라서 편지를 썼고, 권은 시간적인 맥락과 순서가 뒤섞인 편지를 읽었습니다.
하지만 그 편지가 권에게 전해질 것인지를 확신할 수 없었던 모리와 그 편지를 뒤죽박죽 읽은데다가 끝내 한 장은 읽어내지 못한 권은 시간 사이에서, 혹은 시간적 맥락에 상관없이, 결국 서로로부터 미끄러지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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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전에 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내내 일렁이는 ‘자유의 언덕’은 잠든 남자와 병든 여자의 참 이상한 동화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