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역사

제멜바이스

휴먼스테인 2014. 8. 12. 04:01

제멜바이스

상당한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 돌이켜 보면,

그는 누구보다 인류에게 큰 도움을 주었고 인명을 구하는 데 누구보다 많이 기여했다.

그 사실을 어찌 부정할 수 있으랴.

이그나츠 제멜바이스.1 헝가리 출신의 산부인과 의사였던 그는

손 소독의 중요성을 가장 먼저 인식하고 분만 시술을 앞둔 의사들과 산파들에게 손을 씻으라고 요구했다.

산부인과 병원에서 수많은 여자들이 산욕열 때문에 죽어 가는 것을 그저 운명으로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당시 프랑스에서는 산욕열이 추위나 달의 영향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1846년 제멜바이스 박사는 빈 종합 병원의 산과에서 교수를 보좌하는 의사가 되었다.

동료인 해부학자 야콥 콜레츄카가 사망했을 때,

그는 야콥을 치료하려던 의사들이 더러운 손으로 병원균을 감염시킴으로써

환자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세균의 정체를 아직 모르던 시절이라 제멜바이스는 <눈에 보이지 않는 독>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는 그 독을 없애기 위해 염소화 석회 용액으로 손을 씻자고 권유했다.

1847년부터 그의 지시를 따랐던 산과에서는 환자들의 사망률이 12퍼센트에서 2.4퍼센트로 낮아졌다.

당시에는 부검을 하던 의사가 손도 씻지 않고 분말실로 들어가는 경우가 흔했다.

제멜바이스는 그런 관행을 없애기 위해 분만에 관여하는 모든 의료진에게 손 소독을 권장했다.

그의 권고를 충실하게 이행한 산과에서는 사망률이 1.3퍼센트로 더 내려갔다.

하지만 그의 성공은 동료들의 질시와 증오를 야기했다.

빈의 의료계에서 그는 갖가지 조롱이 대상이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손을 깨끗하게 씻자는 그의 권고를 <유대인들의 미신> 으로 간주했다

(모세의 율법에 환자를 보살피기 전에 손을 씻으라는 말이 있기는 하다).

제멜바이스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유럽의 다른 지역에서도 지지를 얻지 못했고

오히려 놀림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다.

그는 결국 빈의 병원에서 쫓겨나 아버지가 태어난 도시인 페슈트2의 산과 병원으로 근무지를 옮겼다.

헝가리 정부는 그의 의견을 수용하여 손 소독을 널리 권장했지만,

빈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그것을 어리석은 주장으로 여겼다.

1865년 그는 페슈트 대학에서 그 문제를 놓고 발표를 하려던 차에 경찰에 붙잡혔다.

그의 동료들은 신경 쇠약에 걸린 그를 억지로 빈에 보내어 정신 병원에 입원시켰다.

당시의 증언에 따르며, 제멜바이스는 <손을 씻는 것>에 너무 집착한 나머지

의료진을 짜증나게 하고 남자 간호사들과 싸움을 벌이기가 일쑤였다.

무엇보다 기이한 아이러니는 그가 심하게 싸움을 벌이다가 여러 곳에 상처를 입고 한 의사의 치료를 받았는데,

이 의사가 손을 씻지 않은 탓에 그에게 세균을 감염시켰다는 사실이다.

그 세균 때문에 그는 괴저에 걸렸고 끔찍한 고통을 겪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뒤로 20년이 지나서 살균법이 개발되었고,

그럼으로써 제멜바이스의 직관을 비로소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되었다.

놀림을 받던 그의 주장은 자명한 사실로 바뀌었고, 이후로 수백만 환자들의 목숨을 구하는 데 기여하게 된다.

 

1 이것은 독일어 발음으로 표기한 것이고, 성을 먼저 말하는 헝가리 인들의 방식을 따르면 멜베이시 이그너츠.

2 도나우 강 서안의 부더와 동안의 페슈트가 통합되어 부다페스트가 된 것은 1873년의 일이다

 

에드몽 웰즈,『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제7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이세욱옮김,3인류4,p156~158,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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