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의 상황은 어떠했습니까?”
-구한말에서 일제 식민지로 들어갔을 때의 비극적 상황에 맞먹는 또 하나의 비극이 우리 민족에게 찾아왔다. 이것은 단지 기독교사의 문제라기보다는 우리나라 문명사의 전반에 해당되는 이야기일 것이다. 8·15해방은 독립이 아니었다. 독립獨立이란 홀로(獨) 서는(立)것이다. 자력에 의하여 자립하는 것이다. 해방은 외세에 의하여 갑자기 일제의 압제로부터 풀려난(풀릴 해解 풀 방 放) 사건일 뿐이다. 그래서 주체세력이 없는 해방이었다. 독립의 주체가 없었기 때문에 해방 후 정국이 결국 분단상황을 맞이하게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역사의 귀결이었다. 북한은 연안파나 남로당과 같은 주체세력이 득세하지 못하고 소련세력을 업은 김일성이 장악하게 되고, 남한은 건준이나 임정과 같은 정통성 있는 세력이 득세하지 못하고 미국세력을 업은 이승만이 장악하게 된다. 이승만에 의하여 기독교는 변질된다. 이승만의 선생은 서재필이다. 이승만은 청년시절에 서재필을 흠모하면서 독립협회의 열성회원이 되었고 만민 공동회의의 웅변가가 되었다.
서재필은 18세 때 알성시에서 병과로 합격한 천재였고 그 후 갑신정변의 주역이 되었다가 민씨세력에 의하여 대역죄인이 되었다. 반역자로 몰린 후 서재필의 부모는 모두 자결하였고, 이어 부인도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단 하나의 혈육이던 두 살 된 아들은 죽은 어머니의 시체앞에서 보살피는 사람이 없어 굶어죽었다. 동생 재창은 의금부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참형을 당했다. 그토록 끔찍한 인간적인 비운을 맛본 서재필은 일본으로 망명했다가 미국으로 건너가는 데 성공한다. 서재필이 혈혈단신으로 미국에서 고학하면서 한국인 최초로 미국 의학사(MD)가 되었고, 명문가의 딸 뮤리엘 암스트롱과 재혼하게 되는 과정은 참으로 눈물겨운 사연이 많다. 아쉽지만 또 얘기가 길어지게 되니깐 생략하겠는데, 서재필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기독교 신앙에 귀의했지만 그는 기독교보다는 항상 민족의 대의를 우선시했다. 기독교를 위하여 민족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을 위하여 기독교가 있다고 생각했다. 서재필이 해방후 김규식과 여운형의 요청으로 귀국했다가 결국 이승만에게 밀려 다시 떠나갈 때 그가 인천항에서 군중에게 남긴 말은 그의 주체사상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우리역사상 처음 얻은 인민의 권리를 남에게 약탈당하지 말라! 정부에게 맹종하지 말라! 인민이 정부의 주인이요, 정부는 인민의 종복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아니 된다. 그러므로 이 권리를 외국인이나 타인이 빼앗으려거든 생명을 바쳐 싸워라! 나의 평생의 소원이다”(1948.9.11).
그러나 이승만은 기독교를 철저히 그의 친미행각에 활용했다. 이승만도 만민공동회의 리더로써 5년7개월의 한성감옥 수인생활 끝에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는데 그는 이미 감옥생활을 통하여 조선을 기독교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는 “기독교입국론”을 확고부동한 그의 철학으로 만들었다. 그가 미국유학생활을 재정적으로 지탱한 것도 결국 주말에 미국의 보수적 분위기의 교회들을 다니면서 한국선교의 “간증”을 하여 벌어들인 성금 덕분이었다. 청년 이승만은 잘 생겼고, 영어를 탁월하게 잘했고, 웅변실력이 있었다. 이승만은 미국의 고상한 촌놈들을 웃기고 울리는 희한한 재주를 개발했다. 그의 정치적 활약은 기본적으로 그 개인의 영달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로마제국의 통치방법을 너무도 잘 터득한 사람이었다. “디바이드 앤 룰divide and rule.”그는 분열의 명수였다. 그가 있는 모든 곳에서는 분열과 대립이 있어났다.
이승만은 실제로 해방후 혼란된 정국을 이끌어갈 만큼의 영도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헛폼은 그의 삶이 구현한 개화의 상징성과 미국이라는 거대세력의 지원 때문에 어리석은 다중에게 멕혀들어가는 측면이 있다손 치더라도 그토록 많은 정적政敵과 애국자들을 암살하거나 거세하면서 드라이브해 간 그의 치세방략은 진정한 민심을 획득하기에는 근원적으로 역부족이었다. 사실 이승만 정권은 붕괴일로에 있었다. 이승만만 혼자서 자객을 보내며 세상을 다 말아먹을 수 있도록 호락호락한 정치판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왜 이승만은 그토록 많은 무리한 정치파동을 일으켜가면서도 장기간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는가? 그것은 김일성이 유지시켜준 것이다. 6·25전쟁이라는 분단질서의 고착과 그것으로 유도된 확고한 미·소냉전체제의 새로운 세계질서의 틀속에서 이승만 정권의 지속은 불가피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의 대화의 주제는 기독교다. 이승만은 열렬한 친미와 열성의 기독교입국론과 치열한 반공의 복합체라는 것만 상기하는 것으로 족하다. 해방 후 기독교는 미군정의 치세와 이승만의 득세로 인하여 이 땅에서 최초로 모든 압제에서 풀려나 인민대중으로 파고들 수 있는 호기를 얻게 된다. 그런데 대비적으로 북한에서는 기독교의 대대적인 탄압이 일어났다. 맑스 형님은 종교는 아편이라고 생각했고 공산혁명을 위하여 기독교는 반동적 역할을 수행할 뿐이라고 믿었다. 기독교의 인간평등은 원죄라는 부정적 인간관에 뿌리박고 있을 뿐이며, 구원이나 속죄는 억압받는 노동자 대중의 무기력감이나 운명의 의식이나 반항의 좌절감을 조장할 뿐이다. 초기의 원시기독교공도에도 근원적으로 소비의 공동체지 생산의 공동체가 아니다. 기독교사회주의도 모두 봉건적 보수주의자들의 기만술에 불과하다. 종교는 인간의 미성숙한 자기왜곡의 표현에 불과하다. 인간을 불완전하고 타락한 존재로 보는 모든 속박을 벗어던지고 자기의 가능성을 최고로 발현하는 자아해방이야말로 인간의 의무며 공산혁명의 첩경이라고 믿었다.
김일성의 탄압이 시작되자, 북한의 기독교도들은 대거 남하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승만의 반공철학의 충실한 사도가 된다. 기독교, 특히 프로테스탄티즘은 본시 평안도를 중심으로 뿌리를 내린 것이다. 그런데 그 터전을 잃자 그들은 강렬한 반공사상을 가지고 남한에서 맹렬한 활약을 펼치게 된다. 해방 후 기독교의 리더들이 대부분 북쪽 출신이라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남한의 중요한 교회센터들이 서북청년단과 같은 흉악한 반공범죄집단의 지원세력이었다는 것도 같이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승만에게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우방이었다. 온갖 폭동이 조장되었다.
“그러니까 한국기독교사에는 서바이벌의 본능과 피세적·종말론적 성격, 그리고 강렬한 반공의식과 친미·개화사상이 한 몸뚱이로 엉겨붙게 되는 역사적 필연이 내재해있다는 말씀이군요.”
-마지막으로 짧은 기간이지만 건강한 저항운동의 시기도 있었다. 박정희 유신체제 하에서 반독재투쟁을 전개하며 이 민족에게 민주의 가치를 구현케 하고자 노력한 사람들, 장공 김재준金在俊 선생, 1901~1987이 리드한 기독교장로회운동과 그 흐름에서 배출된 많은 신학자들·투사들, 그리고 가톨릭의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의로운 사제들, 그리고 성공회의 열린 마음의 사제들, KSCF의 젊은이들, 하여튼 다 열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의 운동이야말로 조선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주체적 저항운동이었으며 민주를 향한 뚜렷한 진보의 족적이었다. 그리고 “민중신학” 이라는 이론적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민중신학은 진정한 민중의 언어를 확보하기도 전에 그 흐름이 미미해지고 말았다. 안병무의 언어는 역시 독일신학의 언어이고 실존주의적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말년에 그 한계를 극복하고자 하는 많은 노력을 했다.
“혹자는 선생님을 한국의 니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요……”
-매우 정중한 표현이기는 하나 나는 한국의 니체가 아니다. 니체가 신의 사망을 선고했을 때, 그는 자기 존재의 그룬트Grund를 송두리째 부정한 것이다. 그는 그만큼 진실하고 타협할 줄 모르는 인간이었다. 그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는 땅과 하늘이 모두 함께 무너진 것이다.
그는 미칠 수밖에 없었다. 서양인이 서양문명을 부정할래야 할 수가 없다. 그의 언어가 이미 자기존재의 모세혈관에까지 다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기독교는 결코 우리 존재의 그룬트가 아니라는 것이다. 안정복이 말한 비윤리적·비합리적·비논리적·반사회적·비현실적·이기적·미신적 기독교가 우리 민족의 심령을 지배한 것은 불과 두 세기밖에 되지 않는다. 내 혈관을 돌아다니는 피를 다 뽑아버릴 수는 없다. 그러나 살갗에 묻은 때는 쉽게 지워버릴 수가 있다. 나는 니체처럼 미칠 이유가 없다. 우리에게 애초에 살해해야 할 신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이며, 주어가 아닌 술부이다. 근본적으로 존재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우리 존재의 그룬트는 오직 상식일 뿐이다. 나는 유교에로의 회귀를 말하지 않는다.
오직 상식의 재건the Reconstrucion of Common Sense을 말할 뿐이다.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인생을 살아가는데 꼭 종교는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이 살아가면서 검토되지 않은 채 자명한 공리처럼 들어앉어 있는 사유의 콤플렉스는 매우 위태로운 것이다. 인간에게 종교는 좋은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종교가 인간에게 끼친 악영향은 선영향의 수천만 배가 된다. 인류의 모든 억압구조가 종교에서 생겨난 것이며, 니체의 말대로 인류의 모든 노예근성이 종교가 세뇌시켜온 것이다. 인간을 가장 거대규모로 파멸시키는 과도한 전쟁들이 거의 모두 종교적 명분으로 자행되어온 것이다. 현재도, 팔레스타인,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아프리카의 종족 사이에서 벌어지는 전쟁이 모두 종교와 관련이 있다. 이델올로기의 대립도 모두 종교와 연결되어있다. 종교가 없으면 존 레논이 부른 노래 『이매진』의 가사대로, 전쟁도 없어지고 탐욕도 없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평화롭게 사는, 푸른 하늘 아래의 한마음 공동체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에도 물론 위대한 정신을 가진 훌륭한 종교지도자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명료하게 알아야 할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종교가 역사를 리드한다는 착각을 가져서는 아니 된다는 것이다. 종교는 역사보다 앞서가면 안된다. 그것은 증세기적 발상이다. 종교는 역사를 뒤따라와야 한다. 역사는 오류도 많고 불행한 사태를 필반必伴한다. 종교는 역사를 뒤따라오면서 겸손하게 그러한 역사 수레바퀴의 잔재를 수습하기만도 버거울 정도로 일이 많은 것이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나가야 할까요, 안 나가야 할까요? 이런 문제도 명료한 단안을 내리기에는 공연히 두려운 듯한 심사가 엄습합니다.”
-여태까지 나의 논리를 이해한 사람이라면 과연 그러한 어리석은 질문을 나에게 던질 필요가 있을까?
“괜히 쫄리거든요.”
-단언한다. 한국의 젊은이들이 교회를 나가지 않을수록 우리 민족에게는 희망이 있다. 지금 한국의 교회는 하느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있지 않다. 한국의 교회는 민증을 기만하며 억압하며 예수의 십자가를 배반하고 있다. 21세기의 교회는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의 질곡으로부터 인간을 해방시킬 때만이 그 존립가치를 지닐 수 있다. 나의 언어를 독설이라 말하지 말라! 예수도 그를 비방하는 자들을 일러 “독사의 자식들”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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