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론 머스크 모험심의 원인
할데만 가족의 모험 정신은 한계가 없는 것 같았다. 1952년 조슈아 부부는 비행기를 타고 아프리카를 통과해 스코틀랜드와 노르웨이까지 2만 2,000마일에 이르는 일주 여행을 했다. 조세핀은 안내자 역할을 맡았고 면허가 없었지만 직접 비행기를 몰기도 했다. 결국 부부는 1954년에 3만 마일을 비행해 오스트레일리아를 다녀오는 쾌거를 거두었다. 신문은 부부의 여행을 보도하면서 자가용 비행사로는 유일하게 단발비행기로 아프리카에서 오스트레일리아를 비행했다고 적었다.[3]
하늘을 날지 않을 때면 할데만 가족은 거창한 탐험에 나서서 덤불을 헤치며 아프리카 남부에 있는 버려진 도시로 추정되는 ‘칼라하리 사막의 잃어버린 도시’를 찾아다녔다. 당시에 다섯 명의 자녀가 아프리카 덤불숲 한가운데 서서 찍은 가족사진이 지금껏 남아 있다.
사진에서 자녀들은 커다란 금속 냄비 주위에 옹기종기 모여 모닥불을 쬐고 있다. 접이식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책을 읽는 아이들의 모습이 편안해 보인다. 뒤에는 루비처럼 빨간 벨랑카 비행기가 버티고 있고 텐트와 자동차가 있다. 고요한 장면이라 사진에서는 이러한 여행에 얼마나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기는 어렵다. 한번은 가족이 타고 가던 트럭이 나무 그루터기를 들이받는 바람에 범퍼가 냉각장치 있는 곳까지 밀리도록 찌그러졌다. 통신수단이 없고 인적이 끊긴 곳에 갇혔으므로 조슈아는 사흘 동안 트럭을 고쳐야 했고 그동안 가족은 음식을 구하러 사방을 돌아다녔다. 어떨 때는 하이에나와 표범이 밤에 무리 지어 나타나 모닥불 주위를 빙빙 돌아다녔고 아침에 눈을 뜬 가족은 식탁에서 1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서 있는 사자를 발견하기도 했다. 조슈아는 주위를 둘러보고 가장 먼저 눈에 뛰는 램프를 움켜쥐고 휘휘 흔들면서 사자에게 저리 가라고 소리쳤다. 그러자 사자는 신기하게도 물러났다. [4]
조슈아 부부는 자유방임주의로 자녀를 양육했고 이러한 방식은 머스크 세대까지 이어졌다. 그들은 아이들이 적절하게 행동하는 법을 직감적으로 알아가리라 믿었으므로 결코 벌을 주는 법이 없었다.
부모가 엄청난 비행을 하러 떠나고 나면 아이들은 집에 남아 있었다. 아들인 스콧 할데만은 자신이 럭비 팀 주장이고 반장이었는데도 아버지가 학교를 단 한 번도 찾아온 적이 없다고 회상했다. “아버지에게는 그 모든 것이 당연했습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어느새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어요. 그냥 하겠다고 결심하고 행동으로 옮기면 되죠. 그런 면에서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일론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셨을 겁니다.”
머스크의 외할아버지 조슈아는 1974년 72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기둥 두 개에 묶여 있는 선을 보지 못한 채 비행기를 타고 착륙연습을 하다가 선이 바퀴에 말려 들어가 비행기가 뒤집히는 바람에 목이 부러졌다. 당시 일론 머스크는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나이였지만 할아버지의 탐험 이야기를 많이 듣고, 덤불숲을 헤치고 다녔던 여행을 기록한 슬라이드를 무수히 보면서 자랐다.
일론은 이렇게 회상했다. “할머니는 여행하다가 어떻게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는지 말씀해주셨어요. 도구도 전혀 갖추지 않고 그야말로 맨몸으로 비행기를 몰았답니다. 무선 통신기도 없었고 항공지도 대신 도로 지도만 딸랑 들었는데 그나마도 정확하지 않았다고 해요. 할아버지에게는 그만큼 탐험과 모험을 향한 욕망이 컸던 거죠.”
머스크는 위험을 무릅쓰는 자신의 유별난 성향이 틀림없이 외할아버지에게서 왔으리라고 생각한다.
「애슐리 반스지음,일론 머스크, 미래의 설계자,p47~50,김영사」
3 이 여행에서 조슈아 부부는 아프리카 해안을 이륙해 아라비아반도를 가로질러 이란ㆍ인도ㆍ말레이시아를 통과하고 티모르 해협을 거쳐 오스트레일리아에 착륙했다. 여행에 필요한 비자와 서류를 준비하는 데만 꼬박 1년이 걸렸고, 여행하는 동안 배탈과 불규칙한 일정으로 끊임없이 고통을 겪었다. 스콧 할데만은 이렇게 회상했다. “아버지가 티모르 해를 건너다가 기절하는 바람에 오스트레일리아에 도착할 때까지 조종간을 잡아야 했습니다. 아버지는 비행기가 착륙하기 직전에 정신을 차렸어요. 기절한 원인은 과로였습니다.”
[4] 조슈아 부부는 기량이 뛰어난 명사수여서 전국 사격 시합에서 우승했다. 1950년대 중반 두 사람은 자신들의 포드 스테이션 왜건을 몰고 케이프타운에서 알제Algiers까지 8,000마일을 달리는 자동차경주에서 프로들을 제치고 공동 1위를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