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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주진우와 김어준

휴먼스테인 2015. 11. 30. 10:03

연말에 김어준 총수를 프랑스 파리에서 만났다.

첫날은 지인의 빈집에서 신세를 졌다.

집엔 가구도 TV도 없었다.

휑한 바닥에 매트리스만 깔고 잤다.

추웠다. 무엇보다 영화 세트장 같은 현실이 도망자임을 여실히 느끼게 해주었다.

파리에서 총수와 함께 사는 동안은 이사의 연속이었다.

처음에는 호텔에서 지내다가 체류 기간이 길어지자 주택을 빌려서 생활했다.

내 짐은 캐리어 달랑 하나.

그런데 패션에 관심이 많은 총수가 옷을 사들이면서 짐이 늘어났다.

총수가 돈 쓰는데는 고기와 옷뿐이다.

나도 쇼핑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총수의 패션에 대한 열정에 비하면 1백분의 1도 안 된다.

시간개념이 없는 총수가 유일하게 늦지 않는 약속이 쇼핑 약속이다.

쇼핑 갈 때는 심지어 20분 일찍 나와서 자기가 탄 지하철을 타라고 닦달하기도 했다.

가장 싫었던 것은 이사할 때 그 많은 옷이 구겨지면 안 된다고 간이 옷걸이를 짊어지고 파리 시내를 활보해야 했던 일이다.

패션쇼 스태프들이 옷을 옮기듯 말이다. 누가 보면 의상실털이범 같았을 거다.

도망자 아니 도망자 생활은 쉽지 않았다.

연예인도 아닌데 얼굴이 알려져서 마음 놓고 돌아다닐 수도 없었다.

파리 뒷골목에서 모자를 쓰고 지나가는데도 사인해달라는 사람이 있었다.

내가 파리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 류승완 감독이 파리에 머물고 있던 동생 류승범을 보냈다.

승범이가 노천카페에서 맥주 한잔 하면서 파리 생활에 대해 조언해줬다.

며칠 지나 식당에서 우연히 만난 한 교민이 대뜸 류승범씨랑 같이 다니신다면서요?” 라고 말을 걸었다.

외국이 더 무서웠다. 제대로 돌아다닐 수조차 없었다.

그래서 한국 슈퍼마켓, 한국식당은 아예 가지 않았다.

괜한 말이 나올까봐.

해 질 무렵에 미술관에 가거나 혼자서 밤 산책을 하곤 했다.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은 열 번도 넘게 갔다.

그럴 때마다 총수는 그림 본다고 고기가 나오냐라면서 비난했다.

야만적인 종육주의자…….

책 보고 산책하고 미술관 가고…….

그러면서 틈날 때마다 스위스에 가서 계좌를 뒤져보고 있었다.

총수는 아침에 스테이크, 점심에 스테이크, 저녁에 스테이크를 먹었다.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프랑스는 고기 질이 좋고 저렴하다면서.

총수가 제일 먼저 배운 불어가 앙트르코트entrecôte’  세냥saignant’이었다.

등심스테이크설익은 고기 영어로는 rare’라는 뜻이었다.

체류가 길어지자 먹는 것도 문제였다.

한식을 먹고 싶을 때는 김치를 많이 넣고 라면을 끓여 먹었다.

거기다 달걀 모양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햇반을 함께 넣어 먹었는데 우리는 이걸 햇반 리조토라고 불렀다.

라면 맛에 길들여진 김 총수는 망명라면가게를 내자고 했다.

내가 하얀 와이셔츠 입고 라면을 끓이고, 자기는 카운터를 보겠다고 했다.

라면집과 함께 낮에는 주진우의 미술관 기행’, 밤에는 김어준의 육식 투어등의 여행 상품까지 만들자고 했다.

김 총수는 소싯적에 잘나가던 여행 가이드여서인지 아이디어가 많았고, 가게 자리까지 보고 다녔다.

실제로 투자하겠다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물론 나는 턱도 없다고 비웃었다.

 

「주진우지음,주기자의사법활극,p56~57,푸른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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