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롯’은 바울 신학에 가려진 예수의 역사적 복원을 꾀한다.
‘경기동부’는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그룹’이 어떻게 발생했는지 그 연원을 밝힌다.
메시아 운동이 체제 내 모순에서 생긴다는 점에서 두 책은 겹쳐 읽힌다.
시사인 [343호] 승인 2014.04.12 장정일
<젤롯>은 신학론적 예수가 아닌 역사적 예수를 탐구한다. 이런 책은 이미 많이 나와 있는 데다가 지은이가 강조하는 결론도 새롭지는 않다. 이 책이 돋보이는 것은 역사적 예수를 복원하고자 공관복음(마가복음·마태복음·누가복음)과 요한복음을 파고든 점이다. 이런 방법론은 마이클 베이전트와 리처드 레이가 <사해사본의 진실>(예담)을 쓰면서 “역사적 기록과 증거라는 측면에서 볼 때 모든 학자들이 알고 있듯이 전혀 신뢰할 수 없는 것”이라며 복음서를 배척한 것과 다르다. 역사적 예수를 밝혀보겠다는 여러 책들이 복음서를 불신하면서 ‘나그함마디 문서’나 ‘쿰란 문서’를 비롯한 외경(apocrypha)을 탐색한 반면, 지은이는 불확실하고 모순투성이인 복음서에서 복음사가들이 미처 지우지 못한 예수의 실체를 찾는다.
예수가 태어나고 자랐던 시절, 유대는 로마의 속국이었다. 유대의 지배계급인 분봉왕과 대제사장 계급은 로마 총독과 결탁하여 유대 민중을 수탈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빠른 속도로 부패했다. 그러자 언약의 땅인 이스라엘과 예루살렘 성전에서 부정한 권력과 이방 군대를 몰아내겠다는 예언자 겸 혁명가들이 속출한다. 기원 1세기 동안 유대인이 살던 팔레스타인 전역은 종교적 열망과 정치적 변혁이 합쳐진 ‘메시아 운동’으로 들끓었고, 메시아를 자처하는 숱한 혁명가들이 십자가형을 받았다. 예수에게 세례를 준 세례요한도 메시아 운동을 벌이다가 헤롯에 의해 참수됐다.
메시아 운동에 적극 참여한 사람을 젤롯(Zealot)이라고 부른다. ‘열심’을 뜻하는 이 말은 원래 토라(모세 5경)와 율법을 엄격하게 준수하고 이방신이나 이방 주인을 섬기지 않으며 하느님의 주권에 무조건 헌신하는 것을 의미한다. 로마의 속국이 된 이때는 열심이라는 이상이 로마인과 로마에 빌붙은 유대 지배층에 대한 무력 투쟁과 동의어였다. 낙후된 갈릴리 지방에서 농토도 없는 목수의 아들로 자란 예수는 가난한 농촌을 집중 공략했던 메시아 운동에 대해 잘 알았다. 훗날 예수는 선배 메시아 운동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궁벽한 어촌 지역을 훑고 다닌 끝에, 베드로를 비롯한 어부 네 명을 첫 번째 추종자로 얻었다.
일반적으로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고 한쪽 뺨을 맞으면 다른 쪽 뺨마저 대는 평화주의자로 묘사되지만, 네 복음서에는 ‘옷을 팔아 칼을 사라’거나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는 등의 호전적인 언사가 더 많다. 예수는 내적인 변화에 덧붙여 현실의 정치·종교·경제 체제가 완전히 뒤집혀야 하느님의 통치가 이루어진다고 이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론적 해석은 예수의 칼을 영적 무기나 믿음으로 윤색하면서 예수를 비폭력주의자로 만든다.
‘마가복음→마태복음·누가복음→요한복음’은 예수가 죽은 지 40년이 흐른 기원후 70년부터 100년 사이에 차례로 완성됐다. 네 복음서는 기원후 66년에 일어난 유대인의 반(反)로마 폭동 이후에 저술되었기 때문에 예수의 혁명적 성격을 누그러뜨리는 동시에 혁명에 실패한 역사적 예수를 하느님의 아들로 변조한다. 네 복음서는 서로 모순된 오류투성이지만, 앞에서 뒤로 갈수록 역사적 예수가 점차 하느님의 아들이 되어간다는 일관성이 있다. 예수가 죽고 난 뒤 초대교회는 예수의 뜻에 충실한 친동생 야고보에게 넘어갔으나, 로마 시민이면서 그리스 문화에 조예가 깊었던 사도 바울에 의해 예수는 유대인이자 민족주의 혁명가라는 역사성을 완전히 빼앗겼다. “바울은 완전히 새로운 교리를 내세웠다. 예수를 근거로 한 교리라지만, 예수도 이해하지 못할 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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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젤롯> 레자 아슬란 지음민경식 옮김와이즈베리 펴냄 |
성남 출신 운동권은 왜 귀환해 조직을 꾸렸을까
<젤롯>이 바울 신학에 가려진 예수의 역사적 복원을 꾀했다면, 임미리의 <경기동부>(이매진)는 통합진보당의 당권파 혹은 그 배후로 알려진 ‘이석기 그룹’의 발생 연원을 밝힌 값진 책이다. ‘경기동부’의 기원은 린든 존슨 미국 대통령이 방한했던 1966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텔레비전 뉴스에 미국 대통령이 둘러본 서울 소공동 지역의 너저분한 중국인촌과 남산 기슭의 판자촌이 비치자, 박정희 대통령은 대대적인 무허가 건물 철거를 지시했다. 거기에 따라 서울시는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990만㎡(300만 평)의 이주지를 마련하고 1969년부터 철거민 13만5000여 명을 강제 이주시켰다. 말로는 ‘한강 이남, 제2의 서울’이라고 했지만 철거민이 도착한 곳은 산비탈에 나무만 베어놓은 곳이었다. 수도·전기·하수처리·교통 같은 기간시설이 구비되지 않은 것도 문제이지만, 서울에서 쫓겨난 철거민의 생계가 더 막막했다.
서울에서 격리된 이들의 생활고를 짐작할 수 있는 사례가 ‘아기를 삶아 먹은 산모’ 이야기다. 이처럼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으나 광주대단지를 개발할 자금이 없었던 서울시는 1971년 제7대 대통령 선거와 제8대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자, 철거민들에게 약 한 달 기한 안에 택지대금 일시불 납부를 공고했다. 서울시가 매긴 땅값은 감정원 평가액보다 2배 비쌌고, 비슷한 시기에 서울시가 철거민에게 불하한 서울 거여동보다 6~16배나 차이가 났다. 박정희 정권 최초이자 최대의 도시 봉기인 8·10 사건은 이렇게 해서 일어났다.
투석전까지 벌어진 봉기는 고작 6시간 만에 끝났지만, 3만~6만명에 이르는 광주대단지 주민의 생존권 투쟁은 박정희 정권을 깜짝 놀라게 했다. 사건이 일어나자 서울시는 주민의 요구를 대체로 수용하고, 광주대단지의 성남시 승격도 결정했다. 대신 이때부터 빈곤과 범죄의 낙인이 찍혀 있던 광주대단지 주민에게는

폭도라는 낙인이 더해졌다. 서울에서 강제로 이주당한 첫 번째 사회적 차별과 배제에 덧붙여진 성남시 주민을 향한 두 번째 차별과 배제는 취직을 하기 위해 이력서를 낼 때 주소를 바로 밝힐 수 없을 정도였다.
사건 이후 광주대단지에는 사회운동의 싹이 트기 시작하고, 1980년대부터 성남시는 광주민중항쟁이라는 집단적 기억을 지닌 전라남도 광주와 함께 민주화운동의 거점으로 성장했다. 특이하게도 성남 지역 출신 대학생은 외지에서 학생운동을 익히거나 경험한 뒤, 자신의 출신 지역으로 돌아와 운동을 계속했다. 지은이는 성남 지역 출신 운동권이 집단으로 귀환해 고향에서 조직을 건설하게 된 배경으로 광주대단지와 관련된 ‘강력한 공통의 기억’을 꼽는다. 경기동부연합의 형성 과정과 인적 관계를 치밀하게 분석한 이 책은 현재 한국 사회가 ‘괴물’로 취급하는 이석기 그룹과 그들의 지지자가 결코 북한의 지령이나 연계에 의해 탄생한 것이 아니라, 해방 이후 만들어진 극우 반공 체제와 자본주의의 모순이 합작해 생긴 내부의 상흔이라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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