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우리 조상이 살던 집들은 실내가 어두웠다.
투명한 창유리가 비싸서 대개는 기름 먹인 종이로 창문을 가렸기 때문이다.
옛날 집들은 추웠다. 일반적으로 벽난로가 유일한 열원이었다.
대부분의 벽난로는 굴뚝의 배연 성능이 좋지 않아서 연기가 밖으로 빠져나가지 않고 실내로 퍼져 나가기가 일쑤였고,
그래서 거주자들은 연기에 질식하지 않기 위해 수시로 창문을 열어 놓아야 했다.
18세기 문헌들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백성들은 실내에서도 외투를 입고 지냈다.
햇볕이 좋은 겨울날에는 집 안이 바깥보다 훨씬 추웠다고 한다.
새로 집을 짓거나 어떤 건물의 일부에 새로 주거를 마련하면
벽난로에 쇠로 만든 톱니 막대를 매달고 여기에 솥단지를 걸었다
(이 톱니 막내를 <크레마예르>라 불렀고, 이 말에서<집들이를 하다>라는 뜻의 표현 <크레마예르를 매달다>가 나왔다).
그 솥단지는 매우 무거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떼어 내어 깨끗이 씻는 것을 게을리했다.
그래서 솥단지 바닥에는 앞서 끓여 먹은 스튜의 찌꺼기가 남아 있기 십상이었고,
그 찌꺼기 때문에 새로 끓인 음식에서 특별한 맛이 나곤 했다.
사람들은 솥단지에 담긴 것을 먹은 다음, 거기에 다시 물을 부어서 수프를 만들고 그 수프에 빵을 적셔 먹었다.
여자들은 불을 피워 놓은 벽난로 가까이에서 요리를 했고,
그러다 보면 불똥이 튀어 폭이 넓은 치마에 불이 붙기가 일쑤였다.
화재는 출산에 이어 두 번째로 여자들의 목숨을 많이 앗아 가던 사망 원인이었다.
산업 사회가 도래하자 부르주아 가정에서는 주방과 식당을 분리하여 서로 멀리 떨어지게 하는 것이 유행했다.
하인들의 귀를 의식하지 않고 자유롭게 대화하면서 식사하기를 원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대개 주방에 쓰레기 배출 시설이 갖춰져 있지 않아 악취가 진동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하인을 부리는 것이 비싸고도 드문 일이 되어 감에 따라 부르주아 가정의 안주인들이 직접 요리를 하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주방과 식당의 거리가 다시 가까워졌다.
수도가 없던 시절에는 물장수가 집집마다 물을 길어다 주었다.
1700년 무렵 파리에는 3만 명이 넘는 물장수가 있었다.
물이 필요할 때는 거리를 향해 휘파람을 불기만 하면 그들이 물지게를 지고 달려왔다고 한다.
전기를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일상생활에 혁명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방 안에 불을 환히 밝히자 벽난로와 촛불의 희미한 빛 속에서는 보이지 않던 찌든 때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벽이며 천장을 깨끗하게 닦기 시작했다.
전깃불은 사람들, 특히 부자들의 활동시간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그전에 사람들은 초를 아끼기 위해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잠자리에 들었다.
또 어둠 속에서 괴한의 공격을 당할까 두려워 밤에는 거의 외출하지 않았다.
그랬는데 전등이 보급되고 거리에 가로등이 생기면서 야간 파티며 잔치가 빈번해지고
연극이나 오페라를 보러 나가는 일이 잦아졌다.
20세기 후반 집집마다 텔레비전을 갖추게 되면서 가정의 풍속도가 딴판으로 달라졌다.
텔레비전은 대개 거실 벽의 한복판을 차지하고
그 불빛은 벽난로의 장작불과 같은 옛날의 불을 대신하여 가족을 한자리에 모은다.
그러면 모두가 침묵을 지키며 오락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나 영화나 뉴스를 본다.
특히 텔레비전 뉴스는 가깝거나 먼 주위 세계의 사건들을 전해주는 무한히 열린 창이다.
그 사건들이 무서우면 무서울수록 가족은 그 불빛 앞에서 더욱 강한 결속력을 느끼고 한 덩어리로 굳게 뭉치게 된다.
에드몽 웰즈,『상대적이며 절대적인 지식의 백과사전』제7권
『베르나르 베르베르 장편소설 이세욱옮김,제3인류2,p110~113,열린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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