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철과 단기
5·16군사혁명이 일어나기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나온 책들을 보면 모두 단기로 되어있다.
단기에서 2333이라는 숫자만 빼면 서기가 된다.
단기란 단국왕검 檀君王儉이 고조선을 세워 즉위한 BC2333년을 원년으로 하는 한국의 연호이다.
고기록들을 종합해보면 단군이 단군조선을 1048년간 다스렸고,
그로부터 164년 후인 주나라 무왕 武王원년에 기자箕子 가 나라를 세웠다는 것으로 요약되는데,
무왕 원년이 BC1122년이므로 이로부터 소급하면 BC 2333년이 단군기원이 된다.
그런데 이 단기를 만든 사람은 나철羅喆이다. 너는 나철이 누군이지 아는가?
“전혀 모릅니다. 들어본적이 없습니다.”
나철羅喆은 본명이 나두영羅斗永,혹은 나인영羅寅永이라고 하는데
1863년에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보성에 가보면 그의 생가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데
사람들이 그가 누구인지를 몰라 매우 초라하게 방치되어 있다.
나철은 29세(1891년 고종28년)때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였으니 대단한 천재라 할 것이다.
승정원 가주서 假注書와 승문원 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를 역임하였으나
나라꼴이 말이 아니고 일본의 침략이 노골화되자
관직을 사직하고 귀향하여 호남의 지식인들을 모아 비밀결사인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하였고,
을사조약 직전인 1905년 6월에는 오기호, 이기, 홍필주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동양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친선동맹을 맺고
대한제국에 대하여는 선린의 교의로서 부조扶助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의 정객들에게 제시하였다.
이러한 그의 동양평화론은 훗날 안중근에게로 계승된 것이다.
응답이 없자 그는 일본의 니쥬우바시 황궁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을 전개한다.
결국 이토오 히로부미의 강압 속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매국노를 전부 제거해야만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날카로운 일본의 단도短刀 두 자루를 사서 품에넣고 귀국한다.
그 뒤로 을사오적암살단을 조직하여
(을사오적은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법부대신 이하영,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을 가리킴)
치밀한 계획을 세웠으나 사전에 탄로가 나서 동지들이 붙잡히자,
동지들의 고문을 덜어주기 위해 자수하여 10년 유배형을 받는다.
그러나 고종이 그의 위인을 알았기에 1년 후에는 특사로 풀려난다.
그 뒤로 그는 서울 재동에서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모시고 단군교를 개창하였는데,
단군교를 사칭하는 친일분자들의 소행으로 이름을 대종교大倧敎로 바꾸게 된다.
이 대종교는 처음부터 교세가 급속하게 팽창하였고,
경술국치 이후에는 국내에서 일제의 탄압을 강하게 받자 그 교단활동을 만주로 옮겼는데,
북간도·서간도 만주지역에서 활약한 독립운동가들의 정신적 구심점이 되었을 뿐 아니라,
교민들의 신앙으로서 생활 속에 깊게 침투하였다.
대종교의 포교활동은 그 것이 곧바로 항일독립운동이었으며,
교단조직은 그것이 곧바로 항일 독립운동의 조직이었다.
우리가 너무 이 대종교의 활약상에 관하여 무지하지만
청산리대첩을 주도한 김좌진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부대가 바로 대종교의 지원조직이었으며,
그 북로군정서의 총재였던 서일徐一장군도 대종교의 대 이론가였다.
대종교의 제3세 교주였던 윤세복尹世福장군도 순결한 배달민족주의에 입각하여
열렬한 독립운동을 전개한 인물이었다.
뿐만 아니라 상해임시정부 성립의 모든 기반을 한 몸으로 마련해놓은
예관 신규식도 대종교의 열렬한 신자였고, 민족사학의 태두 신채호도 대종교를 신앙한 사람이었다.
대종교는 교주 중심의 신앙체계라기보다는
단군이라는 상징체를 중심으로 민족의 결속을 요구한 외로운 광야에서의 외침이었기에
많은 사람이 정신적 지주로 삼았던 것이다.
나철 본인은 1916년 음력 8월 시봉자 6명을 대동하고
단군의 성소인 구월산 삼성사에 들어가 8월14일부터 수행에 들어갔는데
사흘만에 조식법調息法으로 좌탈하였다. 군더더기 없는 일생을 살았다.
“정말 우리가 너무도 망각 속으로 흘려버린 역사의 일면 같군요.”
단기는 나철이 연호로 만들었고,
또 임정 인사들이나 독립운동가들 중에 대종교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1948년 대한민국정부를 수립하면서 공식연호로서 단기를 채택한 것이다.
단기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의하여 62년 1월 1일에 폐지되었으나,
내가 생각하기에는 단기에 묻어있는 민족정서를 생각한다면 단기를 굳이 폐지할 필요는 없는 일이었다.
유대교 정통파 사람들은 아직도 “안노 문디 anno mundi”하는 야훼의 천지창조를 기점으로 삼는 연호를 쓰는데,
BC 3761년 10월7일이 그 원점이다.
하여튼 내가 말하려는 것은 이 모든 연호는 시간을 직선으로 놓고 역사적 사건들을 나열하는 것이다.
그런데 얼마 전까지만 해도 햇수를 이러한 숫자로 기록하는 습관이 부재했다.
나의 윗세대만 해도 해를 갑자로만 기억했다.
올해를 임진년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은 역사를 인지하는 방법이 매우 다를 것이다.
우선 일곱갑자 이전(60x7=420년 전)의 임진왜란이 먼저 떠오를 것이고,
혹은 한 갑자 이전의 판문점 휴전협정이나 반공포로석방을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하여튼 내가 말하려는 것은 시간이란 인식의 모양새를 갖는다는 것이다.
「 김용옥, 사랑하지말자, P53~55, 통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