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는 것은 ‘한국’의 통치하에 있는 사람들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외국의 사례를 들어보자. 류큐왕국(오늘날의 오키나와) 거주자들은 원래 자신이 ‘일본인’ 이라는 인식이 없었으며 그것은 19세기의 병합 후 일본의 국사교육을 통해서 만들어진 의식이었을 뿐이다. 오스트레일리아에 거주하는 일본학 연구자 모리스-스즈키의 주장을 인용해보자.
그러나 오호츠크 연안이나 오키나와와 같은 변경지역의 역사를 고려하면 이러한 접근방법에 대한 몇 가지 문제는 명백해진다. 예를 들어 오키나와의 어린이들은 자기 지방의 과거를 외국이었던 헤이안시대의 일본역사와 동일시할 것으로 기대되는가? 반대로 자기 조상이 혼슈 출신인 일본사람들은 류큐 왕국의 역사를 ‘우리’ 역사로 주장할 수 있는가? 아니면 그것은 오키나와 사람들에 전적으로 ‘귀속’ 되고 구별되는 과거, 즉 ‘그들의 역사’인가? 여기에서조차 더 복잡한 문제들이 대두한다. 왜냐하면 류큐열도의 다른 부분들은 별개의 역사를 지니기 때문이다.[1]
당연히 류큐 왕국의 사람들은 당시 자신을 ‘일본인’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여러 부족/종족에 따라서 다양한 정체성들이 있었다. 오늘날 ‘일본민족’에는 홋카이도 주민이 포함되지만 일본이 그 지역을 지배하기 시작한 것은 겨우 19세기 중반 이후다. 아이누 언어공동체도 마찬가지다. 아미노 요시히코에 따르면 현재 일본지역에 속하는 땅에서 최초의 본격적인 국가인 ‘일본국’이 생긴 것은 7세기 말 정도고 그것이 열도 전체를 점유하지는 못했다. 그에 의하면 토오호쿠 최북부에는 12세기까지 일본국의 통치가 미치지 못했다. 오늘날의 오키나와나 홋카이도 역시 19세기에 와서야 일본의 일부가 되었다.[2] 그전까지 이들에게는 ‘일본인’이라는 정체성이 전혀 없었다. 지금도 오키나와인 상당수는 일본인 정체성이 없다. 미국 영화 <가라테 키드(Karate Kid)>에 나오는 주인공의 선생은 사실은 오키나와인인데 한국이나 미국에서는 그를 일본인으로만 인식한다.
오늘날 프랑스 지역의 일부인 플로렌스 지방에서는 근대 이전에는 프랑스어를 쓰지도 않았으며 프랑스인이라는 의식조차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세계의 모든 지역에서 ‘국어’는 생겨난 것이 아니라 강요된 것이다. 제주도의 사투리는 서울언어의 관점에서 사투리지 그곳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의 독자적 언어다. 더구나 제주도가 ‘탐라민국’이 되었다면 제주도 방언은 표준어가 되고 한국의 입장에서는 제주도가 외국이 되었을 것이다. 실제로 1970년대 일부 대학생들 사이에서 제주도 해방운동의 움직임이 생겼다가 군사독재 정부에 의해 분쇄된 사건이 있었다는 것은 이런 점을 증거한다. 만약에 대마도(쓰시마)가 근대 초엽에 코리아반도에 병합되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대마도인들은 ‘한국인’의 일부가 되었을 것이고 그것은 한국역사에 포함되었을 것이다.
사실 대마도는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조선도 일본도 아닌 그저 대마도였을 뿐이다. 대마도의 역사는 굳이 이야기하자면 ‘부산사’의 일부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는 입장도 있다. 쓰시마를 지배한 ‘소 가문’의 관리는 그들의 가신이면서 간접적으로는 도쿠가와 쇼군체제의 신하이고 동시에 조선왕국의 관리였다는 사실[3]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흑요석을 사용한 작살 및 소바타식 토기 등의 공통된 문화를 가진 ‘해민(海民)’이 조오몬 시대 전기부터 코리아반도 동남안, 대마도, 이키, 북큐슈에 걸친 바다에서 활동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4] 대마도를 일본영토의 일부로 보는 오늘날의 시각으로는 이 사실은 매우 곤혹스럽다. 또한 한국과 일본의 경계를 두부모 잘린 것처럼 명백하게 인식하려는 민족주의 관점에서도 이러한 사실은 거추장스럽다. 이들 ‘해민’은 고대 한국인도 아니고 일본인도 아니다. 그것은 문화ㆍ생활공동체였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한국’과 ‘일본’이라는 영토적 정치적 경계도 없었고 당연히 ‘민족의식’도 없었다. 물론 대마도는 결국 완전히 일본에 병합됨으로써 그것이 이제 일본의 일부라는 사실을 부인하는 사람은 없다.(불가능한 일이지만 대마도에서 반일 민족운동이 일어나서 독립을 하게 되면 대마도인들은 과거의 일본적 정체성을 지우기 위해서 그리고 대마도 민족의 자주적 역사를 발굴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노력하게 될 것이다.) 시대착오적 시각을 가진 사람들은 고대와 중세의 역사를 바라볼 때도 민족주의 관점을 유지한다.
모리스 스즈키가 지적하듯이 ‘한국’, ‘일본’, ‘중국’이라는 민족적 범주가 정착된 것은 근대에 들어와서다. 하지만 현재 일본인들은 이러한 “범주를 자연스럽고 영속적인 것으로 이해하도록, 그리고 이 명칭을 6천 년 전의 세계로 아무 생각 없이 투영하도록”[5] 교육받았다.
이런 시대착오적 역사관은 일본에만 국한된 것만은 아니다. 한국의 역사교육도 현재의 범주를 삼국시대로 그대로 투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리아가 당시에도 존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오류를 반복한다. 모리스-스즈키의 지적처럼, “현재 ‘일본’이라 불려지는 공간의 경계 내에 복수의 정치체와 복수의 역사 리듬이 존재함”[6]을 인정해야 한다. 한국이나 중국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아미노 요시히코는 “ ‘일본인’이라는 것은 ‘일본국’의 국제(國制) 아래에 있는 사람들로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7]라고 단언한 바 있는데 나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바꿔 쓰고 싶다. “ ‘한국인’이라는 것은 ‘한국’의 통치하에 있는 사람들로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렇게 볼 때 고대 및 중세에서 다양한 부족ㆍ종족들이 갈라지고 합치며 근대민족들의 복수적 싹을 마련했던 역사의 우연성과 복잡성에 눈길을 돌릴 필요가 있다.
「권혁범지음,민족주의는 죄악인가, p34~38,생각의나무」
[1] 모리스-스즈키(2004), 「근대일본의 국경만들기: 일본사 속의 변경과 국가/국민 이미지」 임지현(2004), 213쪽.
[2] 아미노 요시히코(2000), 25쪽.
[3] 모리스-스즈키(2004), 204쪽.
[4] 아미노 요시히코(2000), 42쪽.
[5] 모리스-스즈키(2004), 199쪽.
[6] 모리스-스즈키(2004), 214쪽.
[7] 아미노요시히코(2000), 21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