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철학 등

자본주의자의 지옥

휴먼스테인 2017. 12. 24. 15:46

자본주의자의 지옥

 

시장에 완전한 자유를 부여하는 것이 위험한 데는 더욱 근본적인 이유가 존재한다.

애덤 스미스는 구두공이 자신이 낸 흑자를 더 많은 조수를 고용하는 데 쓸 것이라고 가르쳤다.

이것은 이기적 탐욕이 모두에게 이익이 된다는 것을 암시했다.

이윤은 생산을 확대하고 사람을 더 많이 고용하는 데 활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탐욕스러운 구두공이 피고용인들의 월급을 깎고 근로시간은 늘리는 방법으로 이윤을 늘리면 어떻게 될까?

표준답변은 자유시장이 피고용자를 보호해 주리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의 구두공이 월급은 너무 적게 주고 일은 너무 많이 시킨다면, 최고의 일꾼들은 자연히 그를 떠나 경쟁자의 가게로 일하러 갈 것이다.

폭군 같은 구두공에게는 최악의 노동자만 남거나 아무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는 운영 방식을 바꾸거나 사업을 접어야 할 것이다.

그는 자신의 탐욕 때문에 피고용인들을 잘 대해줄 수밖에 없다.

이론상으로는 물 샘 틈 없는 논리 같지만, 현실에서는 물이 너무 쉽게 샌다.

왕이나 사제가 감독하지 않는 완전 자유시장에서 탐욕스러운 자본가들은 독점을 할 수도 있고, 노동자를 탄압하기로 서로 공모할 수도 있다.

만일 국내의 모든 구두 공장을 통제하는 단 하나의 회사가 있거나 모든 공장주가 임금을 동시에 삭감하기로 짬짜미를 한다면 어떻게 될까?

노동자들은 더 이상 일터를 바꿈으로써 스스로를 보호할 수 없을 것이다.

사태는 이보다 더 나쁠 수도 있다.

탐욕스러운 사장들은 노동자들의 이동의 자유를 제한할 수도 있다.

빚을 갚기 위한 노역이나 노예제도를 통해서 말이다.

중세 말 유럽의 가톨릭 지역에는 노예제도가 거의 없었다.

한편 근대 초기 유럽 자본주의의 부흥은 대서양 노예무역의 부흥과 함께 등장했다.

이런 재앙의 책임은 독재적인 왕이나 인종차별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고삐 풀린 시장의 힘에 있었다.

유럽인은 아메리카를 정복한 뒤 금광과 은광을 개발하고 사탕수수, 담배, 면화 농장을 건설했다.

이 광산과 농장은 미국의 생산과 수출의 중추가 되었다.

사탕수수 농장은 특히 중요했다. 중세 유럽에서 설탕은 희귀한 사치품이었다.

중동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에 수입되어 진미 요리나 엉터리 약에 들어가는 비밀 성분으로만 조금씩 사용되었다.

아메리카에 대규모 사탕수수 농장이 건립된 이후, 점점 더 많은 설탕이 유럽에 들어왔다.

설탕 가격은 하락했고, 유럽인들은 단 것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되었다.

기업가들은 엄청난 양의 단 것을 만들어 수요를 충족시켰다.

가령 케이크, 쿠키, 초콜릿, 캔디 그리고 코코아ㆍ커피ㆍ홍차 같은 가당 음료였다.

평균적인 영국인의 연간 설탕 섭취량은 17세기 초에는 거의 0이었지만 19세기 초가 되자 8킬로그램으로 늘었다.

하지만 사탕수수를 재배하고 거기서 설탕을 추출하는 것은 노동집약적인 사업이었다.

적도의 태양 아래 말라리아 감염 위험이 큰 사탕수수 밭에서 장시간 노동을 하려는 사람은 드물었다.

계약직 노동자는 대량소비하기에는 너무 비싼 상품이었다.

시장의 힘에 민감하고 이윤에 탐욕을 부리며 경제성장을 바라는 유럽인 농장주들은 노예로 눈을 돌렸다.

16세기에서 19세기까지 약 1천만 명의 아프리카 노예가 아프리카로 수입되었다.

이 중 약70퍼센트가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했다. 노동 환경은 끔찍했다.

대부분의 노예는 짧고 비참한 삶을 살았다.

그 외에도 노예를 포획하기 위한 전쟁이나 아프리카 내륙에서 아메리카 연안으로 노예들을 옮기는 과정에서 수백만 명이 추가로 사망했다.

모두가 유럽인들이 달콤한 홍차와 캔디를 즐길 수 있게 하기위해서, 그리고 설탕 농업의 거물들이 막대한 이윤을 누릴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자행된 일이었다.

노예무역은 정부나 국가에게 어떠한 통제도 받지 않았다.

그것은 순수한 경제사업으로서, 수요공급의 원칙에 따라 자유시장에 의해 조직되고 자금조달이 이루어졌다.

민간 노예무역 회사들은 암스테르담, 런던, 파리 주식거래소에서 주식을 판매했고, 좋은 투자처를 찾는 중산층 유럽인들이 이 주식을 샀다.

이렇게 모든 돈으로 회사는 배를 사고 선원과 군인을 고용한 뒤 아프리카에서 노예를 사서 미국으로 수송했다.

노예는 대형 농장의 주인에게 팔렸고, 그 수익은 다시 설탕, 코코아, 커피, 담배, 면화, 럼주 같은 농장의 산물을 구매하는 데 쓰였다.

이들은 유럽으로 돌아와 설탕과 면화를 비싼 값에 판매한 뒤, 다시 돛을 달고 아프리카로 향하여 같은 영업을 되풀이 했다.

주주들은 이런 사업 방식에 매우 만족해했다.

18세기 내내 노예무역 투자에 대한 연간 수익률은 약6퍼센트였다.

현대의 컨설턴트라면 누구나 재깍 인정할 만한 엄청난 돈벌이였다.

이것은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옥에 티다.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이윤이 공정한 방식으로 얻어지거나 공정한 방식으로 분배되도록 보장하지 못한다.

그렇기는커녕, 이윤과 생산량을 늘리려는 갈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이 없다.

성장이 최고의 선이 되고 다른 윤리적 고려에 의한 제약을 받지 않을 때, 그 성장은 쉽사리 파국으로 치닫는다.

기독교나 나치즘 같은 종교는 불타는 증오심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자본주의는 차가운 무관심과 탐욕 때문에 수백만 명을 살해했다.

대서양 노예무역은 아프리카인에 대한 인종적 증오에서 생긴 것이 아니다.

주식을 구매한 개인이나 그것을 판매한 중개인, 노예무역 회사의 경영자는 아프리카인에 대해 거의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사탕수수 농장 소유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많은 농장주들이 농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았고, 그들이 원한 유일한 정보는 손익을 담은 깔끔한 장부였다.

대서양 노예무역이 그것만 아니라면 흠이 없었을 기록에 새겨진 유일한 오점이 아니었다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앞장에서 이야기했던 벵골 대기근 역시 이와 비슷한 역학에 의해 유발되었다.

영국 동인도회사는 벵골인 1천만 명의 삶보다 자기 이익에 더 신경을 썼다.

인도네시아에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벌인 군사작전에 돈을 댄 것은 자기 자녀를 사랑하고, 자선사업에 돈을 내고, 좋은 음악과 미술을 즐기는 네덜란드의 정직한 시민들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자바, 수마트라, 말라카 주민들이 겪는 고통은 중히 여기지 않았다.

지구의 한 켠에서 현대 경제가 성장하는 데는 수없이 많은 범죄와 악행이 뒤따랐다.

 

19세기에도 자본주의 윤리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유럽을 휩쓴 산업혁명은 은행가와 자본 소유자를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지만, 수백만 명의 노동자에게는 비참하고 가난한 삶을 선고했다.

유럽 식민지에서는 사태가 더욱 나빴다.

1876년 벨기에의 왕 레오폴드 2세는 중부 아프리카를 탐사하고 콩고 강 유역의 노예무역과 싸우는 것을 사명으로 내건 비정부 인도주의 기구를 설립했다.

기구에는 도로와 학교와 병원을 건설해 해당 지역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한다는 책임도 주어졌다.

1885년 유럽 열강들은 이 기구에 콩고강 유역 230만 제곱킬로미터의 통제권을 부여하기로 합의했다.

벨기에 국토의 75배에 이르는 그 땅은 이후 콩고 자유국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곳에 사는 주민 2천만~3천만 명의 의사를 물어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인도주의 기구는 눈 깜박할 사이에 성장과 이윤이 진정한 목적인 기업으로 변했다.

학교와 병원은 잊혔고, 콩고강 유역은 광산과 농원으로 채워졌다.

그 운영은 대부분 벨기에 관리들이 맡았으며, 이들은 현지인을 무자비하게 착취했다.

고무 산업은 특히 악명 높았다.

고무는 빠른 속도로 중요한 산업 필수품이 되었고, 고무 수출은 벨기에의 가장 중요한 수입원이었다.

고무를 수집하는 아프리카 촌마을 사람들에게는 점점 더 많은 할당량이 주어졌다.

할당량을 채우지 못한 사람에게는 게으름을 이유로 잔인한 벌이 주어졌다.

팔을 절단해버리는가 하면 어떤 때는 한 마을 전체를 학살하기도 했다.

가장 보수적으로 추정해도 1885~1908년 성장과 이윤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희생된 사람은 6백만 명(콩고 인구의 20퍼센트 이상)에 이르렀다. 일부에선 1천만 명에 육박한다고 추정한다.

1908년 이후, 특히 1945년 이후 자본주의의 탐욕에는 어느 정도 고삐가 죄어졌는데, 여기에는 공산주의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

하지만 불평등은 여전히 만연했다.

2014년의 경제적 파이는 1500년보다 크지만, 분배는 너무나 불공평해서 하루 종일 힘들게 일한 아프리카의 농부와 인도네시아의 노동자가 집에 가져오는 식량은 5백 년 전보다 더 적다.

농업혁명과 마찬가지로, 현대 경제의 성장은 거대한 사기로 드러날지도 모른다.

인류와 세계 경제는 성장을 거듭했을지라도 기아와 궁핍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더욱 많아졌는지 모른다.

자본주의는 이 같은 비판에 두 가지 대답을 가지고 있다.

첫째, 자본주의는 오직 자본주의자만이 운영할 수 있는 세계를 창조했다.

세상을 다른 방식으로 운영하려 했던 유일하게 진지한 시도는 공산주의였으나, 그것은 거의 모든 면에서 자본주의보다 훨씬 더 나빴기 때문에 다시 시도해볼 배짱이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기원전 8500년의 사람은 농업혁명에 통한의 눈물을 흘렸을 수도 있지만 농업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늦어버렸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는 자본주의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두 번째 대답은 우리가 인내심을 더 많이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자본주의자들은 천국이 눈앞에 와 있다고 약속한다.

인정하건대, 대서양 노예무역이나 유럽 노동계층 착취 같은 실수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거기서 교훈을 얻었다.

이제 조금만 더 기다리면, 파이가 좀 더 커지도록 놔두면, 모두에게 좀 더 두꺼운 조각이 돌아갈 것이다.

성과가 평등하게 분배되는 일은 영영 없겠지만, 모든 남자와 여자, 어린이를 만족시킬 만큼 충분히 돌아갈 것이다. 심지어 콩고에서도.

실제로 긍정적인 신호가 조금 보인다.

최소한 순수한 물질적 기준에서는—기대수명, 어린이 사망률, 칼로리 섭취—2014년 평균적 인간의 생활수준은 1914년에 비해 상당히 나아졌다.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렇다.

하지만 경제적 파이가 무한히 커질 수 있을까?

모든 파이에는 원자재와 에너지가 필요하다.

어두운 결말을 예언하는 사람들은 호모 사피엔스가 조만간 우리 지구의 원자재와 에너지를 고갈시킬 것이라고 경고한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유발 하라리 지음, 사피엔스, p465~472, 김영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