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동 목사, 송기원
성경에 보면 마지막 심판 때 신이 인간을 심판하는 기준이 나오는데 올바른 사람은 오른쪽에, 잘못된 사람들은 왼쪽에 서라고 한다(모든 것이 동양과 서양이 정반대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예를 들어 서양에선 용이 사탄이라면 동양에선 용이 가장 신성시 되고 왕의 옷자락에서나 볼 정도의 신령한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대표적이다. 또 하나는 동양에선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더 높은 인식이 대표적이라 할 수 있겠다. 즉 동양은 왼쪽이 오른쪽보다 더 긍적적이다.
서양은 오른쪽이 항상 선이었다. ‘내 오른손을 들어….’가 가장 대표적인 성경문구이다.
그런데 교회다니는 이유의 최대 목표가 구원이라고 할 수 있는 구원의 선별기준이 ‘믿음’이라고 배운 사람들은 이 구절을 애써 외면하거나 관심이 없다.
그러나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이 구절을 보면 오른쪽, 왼쪽으로 갈라 세우는 기준에는 신에 대한 믿음 여부는 없다.
사실 이 구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이미 믿음이 있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신에게 떳떳하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내가 당신의 뜻대로 했는데 왜 왼쪽으로 가냐고?”
다음은 마태복음 25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용은 말도 안되는 번역으로 한국교회를 몇십년간 잘 못된 길로 가게 한, 너무나 익숙한 성경번역본 말고 그나마 조금 나은 새번역에서 인용했다.
그는 모든 민족을 그의 앞에 불러모아,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갈라서,
33.양은 그의 오른쪽에, 염소는 그의 왼쪽에 세울 것이다.
34.그 때에 임금은 자기 오른쪽에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내 아버지께 복을 받은 사람들아, 와서, 창세 때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를 차지하여라.
35.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였고,
36.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어 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 할 것이다.
37.그 때에 의인들은 그에게 대답하기를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잡수실 것을 드리고,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실 것을 드리고,
38.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고, 헐벗으신 것을 보고 입을 것을 드리고,
39.언제 병드시거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찾아갔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40.임금이 그들에게 말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가운데,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다' 할 것이다.
41.그 때에 임금은 왼쪽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말할 것이다.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떠나서, 악마와 그 졸개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42.너희는 내가 주릴 때에 내게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고,
43.나그네로 있을 때에 영접하지 않았고,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어 있을 때나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 찾아 주지 않았다.'
44.그 때에 그들도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님, 우리가 언제 주님께서 굶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감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45.그 때에 임금이 그들에게 대답하기를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기 이 사람들 가운데서 지극히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하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하지 않은 것이다' 하고 말할 것이다.
46.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한 형벌로 들어가고,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여기서 핵심 문장은 먹을 것 마실 것 주지 않았다고 책망하는 것은 다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는 구절인데 가장 이해가 안되는 구절은 왜 감옥에 있는 사람을 돌보지 않았다고 책망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한다.
감옥은 자기가 잘 못해서 간 곳 아닌가?
옛날이나 지금이나 감옥에 있는 사람들 가운데 상당수는 올바른 행동을 하다가 감옥에 가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다.
단 한번도 감옥에 갈 일이 없는 목사들, 교인들이라면 정말 단 한번도 뭐가 옳고 뭐가 그른지 생각을 안해봤다는 뜻이다.
왜 문익환 목사가 감옥에 갔는지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사람들인것이다.
그러니 마태복음에 나오는대로 감옥에 갇힌 사람을 돌 볼 생각을 안한 것이다.
이 책을 읽다 문득 생각나서 정말 오랜만에 성경을 찾아보고 올린 글이다.
[아래는 책내용 인용]
계엄법 위반으로 징역 4년을 언도받은 이해동 목사의 글이다.
“그때의 처절했던 경험들을 적으려고 하니 부끄러움이 앞선다. 1980년 5월 17일 밤부터 그해 7월 14일까지 두 달여 동안 당시 남산에 소재했던 중앙정보부 지하 2층에서 내가 겪은 일들을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린다. ‘매에 장사 없다’는 속담이 있거니와 나는 매 앞에 처절하게 굴복 당했다. 사람이 그토록 왜소해질 수 있을 까? 또 그렇게 무력해지고 비굴해질 수 있을까?
나는 목사가 아니었다. 아니, 사람도 아니었다. 그저 살고 싶다는 생존본능에 매달려 양심은 고사하고 최소한의 사람으로서의 품위도 팽개친 채 불러주는 대로 거짓진술을 써주고 엄지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꾹꾹 무인을 찍어준 겁쟁이, 못난이, 변절자, 배신자였다. 그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내 머리에 숯불을 부은 것처럼 낯 뜨거움을 느낀다.”
다음은 심재철과 같은 학생 신분에 같은 죄명으로 기소되어 10년 형을 언도받은 송기원의 글이다.
“나는 어쩌면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죽도록 싫었을 것이다. 그때 밥 위로 떨어진 눈물은 바로 자신에 대한 모멸감과 치욕감에 다름 아니었다.(중략) 고백하거니와 나는 자신이 고문 따 위에 그렇듯 쉽게 무너져 내리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소위 가장 친한 이에게 누명을 씌우는 일에 동조하고, 그렇게 추악하기 짝이 없는 배신을 하다니. 기관원들에게 잡히기 전에 나는 『꽃도 십자가도 없는 무덤』이라는 레지스탕스를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벅찬 감동 속에 읽은 적이 있었다. 아마 내가 그렇듯 벅찬 감동을 받은 것은 무엇보다도 주인공이 어떠한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념을 지켜 떳떳하게 죽음을 맞는 거룩한 장면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바로 저 광주에서는 극악한 군부에 맞선 수백 명이 기꺼이 죽음을 택하여 꽃잎처럼 거룩하게 산화하고 있을 때 나는 단 몇 차례의 고문에도 못 이긴 인간쓰레기가 되어 거짓 자백과 배신을 일삼았다. 그때부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나는 자신을 믿지 못하고 있다. 다른 문인들이 나서서 저 눈부신 5월이며 광주를 노래하고 부르짖을 때마다 나는 쥐구멍을 찾기에 바빴다. 줄곧 문인입네 떠들면서도 나는 지금까지 남들이 모두 노래하고 부르짖는 눈부신 5월이며 광주에 대해서 단 한 줄도 쓰지 못했다. 나로서는 이 글이 바로 1980년 5월에 대해 처음으로 써보는 글인 것이다.”
「이동형 지음,와주테이의 박쥐들,p127~129,왕의서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