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이 가장 발달한 독일에서 어떻게 나치즘이 나오는지....
독일 지식인들에게 나치즘이라는 야만은
오늘날까지도 정리가 안 되는, 도무지 어쩌지 못하는 트라우마다.
독일은 괴테와 쉴러, 베토벤의 나라다.
그 아름다운 문화를 꽃피운 나라에서
어떻게 홀로코스트와 같은 야만이 가능할 수 있었는가에 관해
독일 지식인들은 여전히 납득할 만한 설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나치즘은 절대 개인의 심리로 환원해서는 안 되는 문제였다.
홀로코스트라는 만행이 히틀러와 같은 정신병자의 불특정다수를 상대로 한 살인사건 같은
것이라고 설명하면, 또 다른 병적 개인의 출현은 언제든 가능한 일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아울러 나치즘의 심리학 환원주의적 설명은 독일인들에게 또 다른 문제를 제공하고 있다.
그 치욕스러운 과거로부터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독일인들 각자에게
도덕적ᆞ윤리적 책임을 부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1996년 독일에서 ‘골드하겐 논쟁’이 그토록 격렬했던 것이다.
이전까지 독일 지식인들은 나치즘을
주로 정치ᆞ경제와 연관된 사회 구조적 문제 혹은 사회ᆞ문화적 문제로 설명했다.
산업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이 독일이라는 후발 자본주의 국가에서 모여 나타났다거나,
독일의 독특한 권위주의적 문화가 나치즘의 원인이었다고 규명하는 방식이다.
테오도르 아도르노Theodor Adorno,
막스 호르크하이머Max Horkheimer 등이 이끌던 프랑크푸르트학파는
아버지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하는 독일식 권위주의적 가족 문화가
위기의 시대에 히틀러라는 권위주의적 인물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으로 나타났다고 설명한다.
전후 독일 사회는 모든 종류의 권위주의를 해체하려고 시도했다.
일단 다양한 국가적 행사, 집단적 세리머니가 사라진다.
대학총장, 교수들이 가운 입고 폼 잡는 대학의 졸업식도 사라진다.
13년에 걸친 독일 유학 시절,
나는 교수와 학생들이 다 함께 모이는 행사를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졸업식 가운도 없다.
이제까지 내가 행사에 입고 나간 박사 가운은 한국에서 어쩔 수 없이 맞춘 가짜다.
독일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교수가 입고 있는 박사 가운은 죄다 가짜다.
심지어 학교에서 아이들이 모여 함께 노래하던 합창 시간도 사라진다.
대신 리코더와 같은 아주 ‘착한’ 악기의 합동 연주가 합창을 대신한다.
독일의 68세대는 부부와 자녀로 이뤄진 가족조차 해체하려 했다.
권위주의적 사회의 기원이 권위주의적 가족제도라고 생각한 것이다.
남성 중심적 일부일처제도 당연히 해체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런 종류의 다양한 사회구조적 변혁을 통해 독일인들은
홀로코스트의 도덕적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어 했다.
수십 년이 지나 이런 시도들이 어느 정도 성공하는가 싶던 즈음,
갑자기 대니얼 골드하겐Daniel Goldhagen의 박사 논문
『히틀러의 자발적 학살자들Hitler’s Willing Executioners』이 출판된다.
홀로코스트는 사회구조적 문제가 아니라 독일인들 각 개인의 문제라는 주장이다.
골드하겐 논문의 직접적 모티브는 1992년에 발간된
크리스토퍼 브라우닝Christopher의 『아주 평범한 사람들Ordinary Men』이다.
브라우닝은 폴란드에 투입돼 수만 명의 유태인을 학살한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에 대한 자료를 아주 치밀하게 조사했다.
그 결과, 홀로코스트의 만행을 저지른 이들은
나치의 친위대도, 열혈당원도 아닌 아주 평범한 일반 병사들이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브라우닝에 따르면, 홀로코스트는 나치의 이데올로기에 세뇌되거나
반유대주의를 내면화한 사람들이 일으킨 집단 범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누구나 똑 같은 ‘상황’이라면 101예비경찰대대의 대원들처럼 행동할 것이라는 결론이다.
범죄를 저지른 각 개인에게 면죄부를 주는 상황론이다.
이 같은 브라우닝의 상황론적 결론에 골드하겐은 정면으로 반박한다.
홀로코스트는 절대 상황으로 환원시킬 수 없다는 주장이다.
아주 평범한 독일 국민들 각 개인의 적극적 가담의 결과라는 거다.
이런 골드하겐의 주장을 당시 독일 언론은 아주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도했다.
독일의 대표 시사주간지 ≪슈피겔Spiegel≫은
유태계인 골드하겐을 ‘독일인의 사형 집행자’로 부르기까지 했다.
독일 지식인들은 골드하겐의 개인주의적 결론을 아주 격렬하게 비판했다.
전후 수십 년간 노력해왔던 홀로코스트의 사회구조적 설명이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김정운,에디톨로지 창조는 편집이다,p318~320,21세기북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