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심리
자살자의 유서
휴먼스테인
2014. 8. 12. 03:51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난 후에 내가 119에 전화를 해주면 된다.
그 얘기를 해주자 그녀는 편안해했다.
나는 구체적인 일정을 알려주었다.
-저녁 열한시쯤. 방문과 창문을 천으로 틀어막아야 돼요.
가스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해야지요.
그 다음에는 전기 코드를 모두 뽑고 전화선도 제거해야 됩니다.
스파크가 일거나 하면 폭발할 우려가 있거든요.
그 다음에는 옆집으로 가서 어디 여행을 떠날 테니 집을 잘 봐달라고 예기를 하는 게 좋죠.
그럼 옆집에서 예상치 못한 방문자에게 당신이 여행을 갔노라고 말해줄 테니까요.
그 다음엔 유서를 쓰는 겁니다.
미리 써놓아도 상관은 없겠죠.
유서가 있으면 쉽게 자살로 처리됩니다.
유서는 가능하면 구체적으로 쓰는 게 좋아요.
구체적이지 않은 유서는 경찰의 의심을 받아요.
경찰이 자살과 타살을 구별하는 요소 중 하나는 일단 유서가 있느냐 없느냐, 그 다음에는 유서의 내용이에요.
타살된 후에 누군가 대신 작성한 유서는 대체로 추상적이기 마련이거든요.
구체적으로 주변인물을 거론하면서 쓰는 게 좋아요.
아무개야. 너에게 미안하다. 그때 이러이러해서 서운하게 했던 점 미안하게 생각한다.
이런 식으로 말이에요.
『김영하 장편소설,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p84~85,문학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