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패러독스-1996년까지도 스위스의 대학 진학률은 16퍼센트였다.
스위스 패러독스
경제가 발전하면서 평범한 노동자들이 교육을 더 받아야 할 필요는 늘지 않더라도
고급 직종의 노동자들은 더 많이 교육받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결국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다른 나라보다 생산적인 지식을 더 많이 창출해 내는 나라가
경제적으로 앞서 나가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한 나라의 번영도를 결정짓는 것은 초등학교보다는 대학교의 질에 달려 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그러나 이른바 지식 위주의 시대에서조차 고등 교육과 경제 번영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간단명료하지 않다.
스위스의 놀란 만한 사례를 들어 보자.
스위스는 세계에서 가장 부유하고 산업화된 나라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 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놀랍게도 선진국 중 가장 낮아서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다른 부자 나라 대학 진학률의 3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1996년까지도 스위스의 대학 진학률은 16퍼센트로 OECD 평균 34퍼센트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 이후 이 비율은 상당히 높아져서 유네스코 자료에 따르면 2007년에는 47퍼센트까지 올랐지만
여전히 선진국 중에서 가장 낮고, 특히 대학에 가는 비율이 높은 핀란드(94퍼센트),
미국(82퍼센트), 덴마크(80퍼센트)에 비하면 현저히 낮다.
스위스에 비해 훨씬 못사는 한국(96퍼센트), 그리스(91퍼센트), 리투아니아(76퍼센트), 아르헨티나(68퍼센트) 등의
나라들마저 스위스보다 훨씬 높은 대학 진학률을 보인다는 점은 특히 흥미롭다.
주요 경쟁자들은 물론이고 훨씬 가난한 나라들에 비해 이렇게까지 고등 교육을 등한히 하고도
스위스는 어떻게 세계적으로 가장 높은 생산성을 기록하는 나라 중의 하나로 자리 잡았을까?
나라마다 대학 교육의 질에 큰 차이가 있어서 그렇지 않겠냐는 것이 가능한 대답 중의 하나일 것이다.
한국이나 리투아니아의 대학들이 스위스의 대학만큼 좋지 않기 때문에
스위스에서 대학 가는 사람 비율이 훨씬 낮아도 한국이나 리투아니아에 비해 부자가 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러나 스위스를 미국이나 핀란드와 비교하면 이 설명은 빛을 잃고 만다.
스위스 대학이 너무나 우수해서 미국, 핀란드에 비해 대학 가는 사람의 비율이
절반밖에 되지 않는데도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주장은 말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스위스 패러독스’ 역시 교육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낫다는 사실로 설명된다.
그러나 초중등 교육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낮은 것은 이 시기의 교육이
자아실현, 모범 시민 양성, 민족 정체성과 같은 것을 함양하는 데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라면,
고등 교육의 생산성 향상 효과가 낮은 것은 고등 교육의 기능 중 경제학에서 ‘분류’라 일컫는 기능이 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고등 교육은 피교육자들에게 생산성과 관련된 지식을 상당 정도 전수해 주지만,
그것의 또 하나의 중요한 기능은 그 피교육자들이 얼마나 고용에 적합한지 순위를 매기는 것이다.
많은 직종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능력은 일을 하면서 배워 갈 수 있는 전문 지식보다는
전반적인 기능, 의지, 조직적 사고력 등이다.
따라서 대학에서 역사나 화학을 전공하면서 배운 지식은
보험 회사나 교통부 공무원으로 근무 할 때에는 거의 쓸모가 없겠지만,
대학을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대학을 가지 않은 사람들보다 똑똑하고, 의지가 강하며,
조직적 사고력이 있다는 신호가 된다.
대졸자를 모집하는 회사는 각 직원의 전문 지식보다는 이런 일반적 능력을 보고 직원을 채용하는 것이다.
대학에서 얻은 지식은 대부분 직장에서 수행할 업무와 별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최근 들어 고등 교육의 중요성이 더 강조되면서 대학을 확장할 만한 여력이 있는
최상층 내지는 중산층 국가들에서는 고등 교육을 둘러싸고 바람직하지 않은 현상들이 생기고 있다.
(스위스마저도 이 현상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는 것은 최근 들어 크게 증가한 대학 진학률에서 짐작 할 수 있다.)
대학을 가는 사람들의 비중이 일정 선을 넘어서면 괜찮은 직장을 얻기 위해서는
대학을 가지 않으면 안 되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가령 국민의 50퍼센트가 대학 진학을 한다면 대학을 가지 않는다는 것은
자신이 능력 분포도의 아래쪽 절반에 속한다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고,
그렇게 되면 일자리를 구하는 데 애를 먹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앞으로 일하는 데에 하등의 쓸모가 없는 것을 배우면서
‘시간 낭비’를 하게 되리라는 걸 잘 알면서도 대학을 가게 된다.
저마다 대학에 진학하기를 원하면 고등 교육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그에 따라 대학이 늘어난다.
이렇게 되어 대학 진학률이 더 높아지면 대학을 가야 하는 압박은 한층 증가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 현상은 ‘학력 인플레이션’으로 이어진다.
이제 ‘모든 사람’이 대학을 나왔기 때문에 이 중에서 돋보이려면 석사, 심지어 박사까지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학위들을 밟는 과정에서 앞으로 하는 일의 생산성을 올릴 내용을 배우게 될 확률은 아주 작을 테지만 말이다.
1990년데 중반까지 대학 진학률 10~15퍼센트로도 세계 최고의 국민 생산성을 기록한 스위스의 사례를 고려할 때
그보다 더 높은 대학 진학률은 사실 불필요하다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설령 지식 경제의 부상으로 기술 요건이 많이 올라 스위스의 현재 대학 진학률 40퍼센트대를
하한선으로 친다 하더라도(나는 이 하한선 수준이 너무 높다고 생각한다) 미국, 한국, 핀란드 같은 나라에서는
대학 교육의 절반 정도는 기본적으로 제로섬 게임인 ‘분류’ 과정을 위해 낭비되고 있다는 말이다.
이 나라들의 고등 교육 현실은 영화관에서 화면을 더 잘 보려고 자리에서 일어서는 장면을 생각나게 한다.
한 사람이 서기 시작하면 그 뒷사람도 따라서 서게 되고, 그러다가 일정 비율 이상의 사람들이 서면
결국 모두가 서서 영화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 말이다.
영화관에 있는 사람들은 이제 화면을 더 잘 볼 수도 없으면서 앉아서 보지도 못하는 불편을 감수해야 한다.
『장하준 지음,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김희정,안세민 옮김, p246~249,부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