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비밀스런 빛
몇 년 전에 뉴욕의 한 교회를 목회하던 목사가 주일예배 시간에 “간음죄를 범해 하나님 앞에 7계를 어겼다.”라고 직접 고백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 교회를 30년 가까이 별 무리 없이 목회해 온 목사의 고백이어서 많은 교인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는 간음죄를 지었으며, 진정으로 회개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용서해 주셨지만, 성도들 앞에서 고백하기 위해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도 용서하시고, 간음한 여인도 용서하셨듯이 저도 용서하셨습니다. 성도들 앞에서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목사가 흐느끼듯 말하는 동안 중간 중간에 한숨을 내쉬는 교인들도 있었고, 특히 나이 많은 교인들은 “아멘!”하면서 동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며, 발언이 끝나자 교인들은 목사에게 박수를 보냈다고 합니다. 이 사태는 결국 목사가 사임하는 것으로 일단락되었고, 그 후의 소식은 듣지 못했습니다.
죄의 고백과 하나님의 용서
교회도 사람이 모이는 곳이므로 불미스런 일이 없을 수는 없습니다. 목회자와 교인이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제가 이 이야기를 꺼낸 까닭은 목사의 발언 중에 눈에 띠는 대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스스로 7계명을 범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이는 흔치 않은 일입니다. 잘못을 저지르는 목사는 많지만, 그것을 고백하는 목사는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는 자기 죄를 인정했고,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회개했으며, 하나님께서 자기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밧세바와 불륜을 저지른 다윗과 간음 현장에서 붙들려 온 여인도 하나님께서 용서해 용서하셨듯이 자기도 용서해 주셨다고 말입니다. 자기는 ‘이미’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으니 이제 교인들도 자기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말로는 용서를 구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용서를 ‘강요’하는 것처럼 들립니다.
‘죄의 용서’는 기독교 신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주제입니다. 그것을 신앙의 궁극적인 목표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니까요. 비단 그리스도교뿐만 아니라 다른 대부분의 종교들도 현 상태의 인간은 부족하고 결함이 있다고 말합니다. 왜, 어떻게 해서 결함을 갖게 되었는가 하는 원인과 과정에 대해서는 각각의 종교들이 다른 목소리를 내지만, 어쨌든 인간이 완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데는 의견이 같습니다.
인간 실존의 이와 같은 불완전한 상태를 가리켜 그리스도교에서는 “모든 사람은 죄인이다.”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이 상태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결국 이러한 질문에 대한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어겼기 때문에 ‘죄인’이 되었다고 말하고, 여기에서 벗어나려면 ‘회개’라는 과정을 거쳐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과정은 간단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우선 하나님은 눈으로 보거나 귀로 들을 수 없는 분이고, 근본적으로 알 수 없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는지 여부를 아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이른바 ‘용서의 확신’은 어디서 생겨날까요? 무엇을 근거로 하나님이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는지 알 수 있을까요?
앞에서 이야기한 목사는 다윗과 밧세바의 예를 들었습니다. 다윗은 장군 우리아가 전쟁에 나가 싸우는 동안 그의 아내 밧세바가 목욕하는 광경을 본 후 그녀를 불러들여 불륜 관계를 맺습니다. 그 후 밧세바는 임신을 했고, 부하 장수 아내와의 불륜 관계가 소문날까 봐 두려워한 다윗은 우리아를 전쟁터에서 불러들여 아내와 동침하게 합니다. 하지만 충직한 장수 우리아는 전쟁 중에 자리를 비울 수 없다고 고집하여 다윗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그러자 다윗은 우리아를 최전방으로 보내 전사하게 만든 후 밧세바를 아내로 들였고, 그녀에게서 아들을 얻습니다.
그런데 예언자 나단이 이 사실을 알고 왕에게 나아가 책망하자 다윗은 사태의 위중함을 깨닫고 죄를 고백합니다. 그때 예언자 나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야훼께서 분명히 왕의 죄를 용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왕께서 죽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왕께서 야훼를 얕보셨으니 우리아의 아내가 낳게 될 아이는 죽게 될 것입니다.”(사무엘하 12:13-14)
그 후 아이는 중병에 걸렸고, 다윗은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아이를 살려달라고 야훼께 빌지만, 결국 아이는 죽습니다.
불륜의 죄를 고백한 목사가 예로 든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가 바로 이것입니다. 여기서 다윗의 죄를 책망하고 하나님의 용서를 ‘예언’한 나단이 용서의 증거로 내세운 것은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의 죽음입니다. 그러니 중병에 든 아이를 살려달라고 금식하며 기도한 다윗의 머리는 상당히 복잡했을 것입니다. 자식의 죽음이 자기 죄를 하나님께서 용서하셨음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는 말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보여주는 ‘객관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죄를 지은 사람 자신이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믿는 ‘주관적’인 믿음이 전부입니다.
용서받았음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을 보면서 저는 구약성서 사무엘하11~12장에 나오는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물론 「밀양」이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보다는 훨씬 더 많은 내용을 복잡하게 전개하고 있지만 주인공 신애의 아들 준을 유괴, 살해한 웅변학원 원장이 자기를 용서하려고 면회 온 신애에게 자기는 이미 하나님에게 용서를 받았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저는 다윗과 밧세바의 이야기를 곧바로 떠올렸습니다.
영화「밀양」은 주인공 신애가 아들 준을 데리고 남편의 고향인 밀양으로 내려오는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그녀의 남편은 외도를 했고,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신애는 그런 남편의 고향이고, 그가 살고 싶어 했던 밀양에서 살려고 내려왔습니다. 자동차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만난 종찬에게 그녀는 “밀양은 어떤 곳이에요?”라고 묻습니다. 갈 데 없는 ‘속물’인 종찬은 그녀의 ‘고상한’ 의중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사람사는 데가 다 똑같지예!”라는 깊이가 없는 듯도 하고 있는 듯도 한 묘한 말로 대답합니다.
신애는 밀양에서 살 집과 피아노 학원을 시작할 가게를 얻은 후 떡을 돌리며 동네사람들에게 ‘이사 신고식’을 치릅니다. 동네사람들은 이 외지인에 대해 뒤에서 수군거리고, 신애는 마치 큰돈이나 가지고 있는 듯 행동하는데, 이를 믿은 웅변학원 원장이 신애의 아들 준을 유괴해서 그녀에게 돈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그녀가 가지고 있는 돈은 그리 큰 액수가 아니었고, 유괴범은 준을 죽인 후 곧 체포됩니다.
한편 신애의 피아노 학원 맞은편 건물의 약국 주인은 신애에게 기독교를 전도하려 애씁니다. 그녀가 “사람은 보이는 것만 믿으면 안 되고,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라고 말했을 때 신애는 “저는 보이는 것도 믿지 않아요.”라고 대답하지요. 이런 신애가 나중에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게 되고, 그분께 뭔가를 보여주기 위해 애쓰는 모습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만듭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용서하셨음을 객관적으로 보여주는 증거가 없다는 사실은 ‘죄의 용서’가 중요한 신앙적 주제인 그리스도교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대목입니다. 객관적인 증거가 없는 한 그것은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여기에 선의든 악의든 인간적인 요소가 개입할 여지가 생깁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 대신 죄의 용서 여부를 가려 줄 ‘대리자’가 생겨났고, 제사장이 대리자 역할을 해왔습니다.
신애는 준이 죽은 후 하나님께 귀의해서 위로와 안정을 얻습니다. 그는 주일예배뿐만 아니라 구역예배에도 참석하고, 신앙간증 비슷한 것도 합니다. 너무 짧은 시간에 일어난 변화라서 보는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드는 구석은 물론 있지만, 불행한 일을 겪은 후 신앙에 귀의하는 사람이 적지 않고, 그녀 역시 그런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그녀는 준의 유괴범을 찾아가 용서의 말을 해주겠다고 동료 신자들에게 이야기합니다. 교인들은 꼭 그럴 필요가 있느냐며 그녀를 말리지만, 그녀는 기어코 유괴범을 찾아가 만납니다. 그런데 거기서 그녀는 거꾸러지고 맙니다. 유괴범은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말하는 게 아닙니까! 그가 저지른 범죄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당한 신애 자신이 이제야 그를 용서하려 하는데, 이미 하나님이 그를 용서 하셨다니! 그래서 자기는 더 이상 괴롭지않고 마음이 평안하다니! 어떻게 이런 일이 있다는 말입니까!
그 일이 있은 후부터 그녀는 신앙을 버리고 교인들을 조롱하는 행동을 합니다. 자기를 전도했던 약국 주인의 남편을 유혹해 성관계를 갖기도 하고, 예배가 진행되는 공원에 가서 목사가 기도하는 도중에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틀어 예배를 망치기도 합니다. 결국 그녀는 자살을 시도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교회 여신도들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고백한 목사는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 죄를 용서하셨다고 단정적으로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교인들도 용서해야 한다는 듯이 말입니다. 신애의 아들 준을 유괴 살해한 범인도 하나님께서 이미 자기 죄를 용서해 주셨다고 말했습니다. 자기 때문에 아들을 잃은 엄마 앞에서 말입니다. 이래도 되는 겁니까? 자신의 확신 외에는 그 무엇으로도 입증할 수 없는 하나님의 용서를 가지고 이런 식으로 행동해도 되는 겁니까? 죄를 지어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는데, 죄를 지은 사람이 하나님의 용서만 받으면 그 상처가 자동적으로 사라집니까? 사라져야 하므로 더 이상 왈가왈부하지 말아야 합니까?
너희가 용서하지 않으면 나도 용서하지 않겠다.
마가복음2장에는 중풍이 들어 꼼짝도 못하는 병자를 친구들이 들것에 싣고 예수께 고쳐 달라고 온 이야기가 있습니다. 친구들은 예수께서 있던 집에 사람들이 너무 많아 들것을 들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자 지붕을 뜯고 들것을 밑으로 내려 보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는 들것을 들고 온 사람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거기에 있던 율법학자 몇 사람이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이 사람이 어떻게 감히 이런 말을 하여 하나님을 모독하는가? 하나님 말고 누가 죄를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그런 생각을 품고 있느냐? 병자에게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하는 것과 ‘일어나 네 요를 걷어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것과 어느 편이 더 쉽겠느냐? 이제 땅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사람의 아들에게 있다는 것을 보여주겠다.”
그 후 예수께서 병자에게 “일어나 요를 걷어 가지고 집으로 가라.” 라고 말씀했더니 병자가 벌떡 일어나 걸어갔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여기서 ‘사람의 아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사람의 아들’은 참 얄궂은 말입니다. 이는 말 그대로 사람의 아들, 곧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고 구원과 관계된 특정인을 가리키는 ‘타이틀’로도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예수께서 이 말을 어떤 뜻으로 쓰셨는가에 있습니다. 학자들의 의견은 둘로 갈라져 있습니다. 전자라면 예수님은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말씀하신 셈이고, 후자라면 ‘사람의 아들’이라는 타이틀을 가진 특정인에게만 그 권한이 있다고 말씀하신 샘입니다. 전자라면 대단한 주장입니다. 하나님에게만 있다고 믿었던 죄의 용서 권한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고 선언하셨으니 말입니다. 그렇다면 죄의 용서를 가지고 아무도 장난칠 수 없어집니다. 어느 편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답은 마태복음 6장 14~15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두 문장은 모두 조건절을 가지고 있습니다. 상반절의 조건이 충족되어야 하반절이 성립하게 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하면 하나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실 것이고,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면 하나님도 우리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죄의 용서에 대한 ‘객관적’인 증거를 봅니다.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하는지 여부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셨는지 여부를 알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입니다.
그러므로 교인과의 불륜을 고백한 목사와 영화「밀양」의 유괴범이 말한 ‘용서의 선언’은 순서가 거꾸로 됐습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용서받았다고 말하기 전에 그는 먼저 교인들에게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유괴범인 웅변학원 원장 역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았다고 신애에게 말하기 전에 신애에게 용서를 구했어야 했습니다. 그러고나서 그들이 지은 죄에 대한 용서의 선언은 죄를 지은 당사자가 아니라 그 죄로 인해 고통을 받은 사람들, 곧 교인들과 신애가 했어야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과 귀에 들리지 않는 하나님을 믿기로 작정했다면 피할 수 없는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들리는 것과 들리지 않은 것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삼지 않는 것입니다. 보이고 들리는 것만 믿고,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믿지 않는 태도도 문제지만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을 믿기 때문에 보이고 들리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는 태도도 문제입니다.
신애는 스스로 보이는 것도 믿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녀가 갑작스럽게 보이지도 않는 것을 믿게 되는 일은(물론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날 수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거쳐야 할 어떤 과정을 생략했다는 느낌을 줍니다. 그것은 아들을 잃은 신애가 하늘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 했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비약’이라고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땅에서의 고통을 전적으로 하늘의 힘을 빌려 해결하려는 시도를 신앙이라고 부른다면, 그런 신앙은 영화 속의 신애와 같은 경험을 반복할 가능성이 큽니다. 땅에서 겪는 고통의 문제는 하늘에서만 풀릴 수 없습니다. 그것은 땅에서도 풀려야 하는 것이지요. 그러한 의미에서 신애가 자기를 도와주려 하고, 늘 자기 곁에 있는 종찬의 존재를 무시한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종찬은 신애가 겪고 있는 땅에서의 고통을 위로해 줄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 고통을 위로해 줄 사람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영화「밀양」의 미덕은 아들의 죽음이라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 신애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써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자신에게 고통을 안겨 준 사람을 가시적으로 용서하려 했다는 데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신애의 행위를 그럴 필요가 없는 지나친 행위로 보거나 하나님의 영역을 침범한 행위로 볼 수도 있겠지만, 제게는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라는 성경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한 것으로 보입니다. 문제는 그 용서가 죄 지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는 데 있겠지요.
영화는 하늘의 찬란한 햇살을 보여 주며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저분한 마당 한 구석에 햇살이 비추는 장면으로 끝납니다. 그 중간에 나오는 한 장면이 제게는 의미 있어 보였습니다. 약국 주인이 신애에게 전도하면서 약국 창문으로 비춰 드는 한 줄기 햇살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깃들어 있다고 말하지요. 하지만 신애는 그것은 그저 햇살일 뿐이라면서 약국 주인의 말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밀양에 내려올 때 하늘에서 봤던 햇살은 밀양에서의 사건을 겪으면서 창밖에서 비추는 햇살이 되고, 마지막에는 지저분한 마당 한 구석을 비추는 햇살로 변해 갑니다. 사람의 시선 위에서 비추던 햇살이 시선과 마주보는 곳에서 만나고, 종국에는 시선 밑에서 머뭅니다.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이러한 궤적을 그리지 않나 싶습니다.
「곽건용지음,예수와 함께 본 영화,p124~136 ,forbook」
'인문학 > 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시크릿 레터 (0) | 2018.06.09 |
---|---|
데블스 에드버킷, 다크 엔젤 (0) | 2018.05.10 |
노스 컨트리 영화 설명 중에서 (0) | 2018.02.26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중에서 (0) | 2018.02.14 |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 (0) | 2018.01.25 |